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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왜 아시아 사람들이 공부에 목매고 명문 대학 입학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이었다.
경험보다는 책을 많이 읽고 많은 정보를 암기하는 것이 동양, 특히 극동에 위치한 한국, 중국, 일본의 특징이며,
이것을 ‘공부’라고 부른다.  
 
이러한 공부의 개념을 널리 퍼트린 나라가 중국이었고, 과거시험이란 범국가적 행사를 통해 공부를 부추겼다.  
그 DNA가 오늘날의 대학 입시로 고스란히 전수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 기간 끈질기게 내려온 전통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대, 베이징대, 도쿄대 등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가문의 명예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실력 좋은 선생님의 지도와 부모의 희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결국 동양적인 관점에서의 성공이란 부모의 희생
아래 잘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나 열심히 읽고 암기하여 좋은 성적을 얻어서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것 그 자체이다.
 
도무지 명문 대학 진학 이후의 진로에 대해서는 뚜렷한 비전이나 꿈이 보이지 않는다. ‘뭐라도 되어 있겠지’ 정도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공부의 요체인 발로 뛰고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경험은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공부가 아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중국 시골의 한 초등학교를 찾아가는 대목이 나온다. 진행자가 “대학 가고 싶은 사람?” 하며 손을 들어 보라 하니
모든 학생이 손을 들었다. 이어 “왜 대학에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제비 새끼 같이 작은 입을 쩍쩍 벌리면서 한결같이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이 이 세상을 얼마나 알고 그런 대답을 했나 싶긴 하지만, 아무튼 자기 자신보다는 주변을 먼저 생각하는
관계망적 사고가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결국 좋은 대학 가서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인 것이다.
대견하기도 했지만 안쓰럽기도 했다.
 
동양인들이 서양인들과는 달리 자기 중심이 아닌 관계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동양인에게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몇 형제, 남매의 몇 번 째이고 부모님은 뭘 하시고 등등의 가족 얘기를 먼저 꺼낸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자신이 피아노를 잘 치고 수영하는 것을 즐기며 동물을 사랑한다는 등의 정말 알려 주고 싶은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관계망 속의 사고는 분명 덕목이 있다.
그만큼 행동 하나에도 관계를 고려하여 공동체 지향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인들이 그런 관계망을 잘 활용하고 똘똘 뭉쳐 세계 경제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차이나 타운이 형성돼 있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망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암기하는 공부일변도의 문화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체면이다.  
잘 암기한 결과 좋은 성적으로 명문 대학에 진학하면 그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만족감보다는 체면을
세웠다는 것이 더욱 부각된다.   
 
체면이란 끊임없이 남을 의식한다는 의미다. 영어에서도 체면은 ‘Face’로 표현된다.
우리가 창피한 일을 저지르고 ‘얼굴을 들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체면의 문화에서 나온 표현이다.  
 
결국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체면 세우기 위한 공부가 우선시 되면서 어쩌다 작은 실패라도 하게 되면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기보다는 자괴감에 먼저 빠지고 남 창피해서 어떻게 사느냐와 같은 표현을 입에 달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젠 자기가 좋아서 공부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교사 또는 멘토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경험은 무시되고 주입식, 암기식 공부가 주가 되다 보니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공부 관행이 큰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식으로 교육 제도가 바뀐다 해도 그에 맞춘 사교육이 생겨나 활황을 이룰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이 대학 입시 과목으로 선정되면 그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비 온 뒤 죽순처럼 생겨날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다니면서 스스로 깨우치고 거기서 자신만의 생각과 관점을 기를 수 있는,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아 가는 과정도  분명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성년이 돼서도 문제는 계속될 수 있다.  
대학 강의 시간표 짜는 것까지 엄마가 해준다는 것은 개그가 아니라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금처럼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취업도 안 되고 할 때 ‘멘토’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훌륭한 멘토를 만나 인생의 올바른 길을 인도받는 것은 복에 겨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만의 경험과 체험에 의한 줏대가 서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준비가 안 돼 있는 사람이 세계 석학을 만나 지도받는다고 개과천선될 것인가? 이 얘기 저 얘기에 귀가 솔깃해 갈팡질팡하게 될 뿐이다.
 
어느 광고 카피에도 나오지만 스스로 멘토가 돼야 한다. 자기 스스로 이 세상과 맞부딪쳐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는 늘 매뉴얼대로 살게
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책의 구절처럼 원본으로 태어나 복사본으로 죽는 것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을 때 자유로워진다.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남 창피해서 어떻게 사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의 두 발로 뛰어 얻은 교훈이 피가 되고 살이 되지 내 주위의 모든 사람과 함께 똑같이 교육받은 내용은 레퍼런스 일 뿐이다.
 
타인의 눈에 보기 좋으라고 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남과 같아야 마음이 놓이는 건 잘못된 습관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인생에 해법을 줄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유일자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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