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2. 16:00

바쁜 현대인들은 책을 깊이 있게 탐독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사람들은 이동 중에 모바일로 팟캐스트를 듣거나 인문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인스턴트 지식을 쌓는다. 짧은 시간에 쉽고 재미있게 지식을 습득하려는 디지털 시대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깊이보다 넓이, 디지털 시대 지식의 경향

“인문학은 위기”라는 말이 출판가에 등장한 건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 근거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0여 년 전 지하철 풍경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대부분 책이나 신문을 봤다. 하지만 지금은 모바일을 들여다본다. 물론 모바일로 텍스트를 읽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보다는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하지만 위기라고는 해도 인문학으로 대변되는 ‘지식’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은 어느 시대이건 어떤 사람이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지식들을, 어떤 방식으로 찾아보느냐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 변화의 특징은 모바일이나 인터넷이 말해 주는 디지털 문화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디지털 문화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지식을 담은 텍스트를 읽지만, 그 읽는 패턴이 달라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체계적으로 읽어 나가는 게 아니라, 중간 중간 하이퍼링크를 통해 이리저리 옮겨 가며 읽는다. 종이 매체 시절의 지식들은 더 깊이 있게 몰입해야 하는 텍스트들이 많았고, 또 그 텍스트를 읽기 위한 몰입의 공간 또한 필요로 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보다 가볍게 이리저리 넘어가며 읽어 낼 수 있고, 특정한 공간 따위도 필요 없는 ‘움직이는 텍스트’들이 주종을 이룬다. 이제 지식은 ‘깊이’보다 ‘넓이’를 추구하게 됐다.

‘지대넓얕’과 ‘알쓸신잡’이 지식을 담는 방식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팟캐스트를 통해 화제가 됐고, 또 책으로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디지털 시대의 지식을 상징하는 텍스트가 됐다. 제목에 이미 담겨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서양철학사나 역사, 경제사 등등의 그 무수한 지식들을 단 한두 시간 만에 읽게 해 준다. 그렇다 보니 깊이는 있을 수도 없고 또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이 효용성을 갖는 건 전체를 통괄하는 지식의 넓이를 개관할 수 있어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고 어느 사상가의 생각이 궁금한 이들은 관련 서적을 통해 깊이를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마치 방송 버전으로 풀어낸 듯한 프로그램이 바로 tvN의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지대넓얕’이라 축약해 부르듯, ‘알쓸신잡’이라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유시민이나 김영하 같은 쟁쟁한 지식인들을 출연시켜 만만찮은 지식을 전해 준다. 그리스를 여행하며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리스의 몰락 이유를 이야기하고, 피렌체를 여행하며 르네상스를 이끈 무수한 천재들이 어째서 그 시기에 그곳에 모여 들었는가를 통해 우리네 사회와의 시사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지식이 가벼운 수다로 풀어내지고, 이 얘기 저 얘기로 넘어가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을 보다 보면, 그것이 마치 하이퍼링크를 타고 서핑하듯 탐닉하는 우리 시대의 디지털 지식 편력과 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흥미진진한 수다로 지식을 풀어내는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낸 책들이 어김없이 출판가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른다는 점이다. 이전 시즌에 출연했던 유현준 교수가 그렇고, 매회 출연해 특유의 잡학다식한 면모를 보인 유시민 작가와 남다른 스토리텔링의 능력자인 김영하 소설가가 그렇다. 이런 현상은 지금의 대중들이 지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또 어떤 지식을 원하는가를 잘 말해 준다. 그것은 어려운 ‘저들’만의 언어로 돼 있는 지식을 좀 더 쉽게 ‘우리들’의 언어로 설명해 줌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다.

큰 인기로 시즌 3까지 이어진 ‘알쓸신잡’ Ⓒ tvN

 

깊이의 아우라인가 넓이의 대중화인가

사실 인문학 원전들은 한글로 번역돼 있어도 마치 외국어로 쓰인 것처럼 난해하게 느껴지는 책들이 적지 않다. 그 원전들은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저마다에게 깨달음을 주는 독특한 아우라를 갖추고 있지만, 많은 대중들이 접근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기술 복제가 만들어 내는 아우라의 상실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대중화를 설파한 바 있다. 즉 과거에는 예술 작품이 원본 소비로서 특정인들만 접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하나뿐인 작품의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복제 시대에는 복제를 통해 그 아우라가 상실되고 대신 누구나 예술 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대중들이 지식을 접하는 방식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우리는 지식에 있어서도 ‘깊이의 아우라’보다는 이제 ‘넓이의 대중화’를 추구하게 됐다.

이런 변화에 대해 상반된 반응들이 나오는 건 아우라와 대중화 사이에서 어느 쪽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아우라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입장이라면 이 ‘넓이’의 추구를 ‘지식의 인스턴트화’, ‘지식의 스낵컬처화’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특정인들이 독점하는 지식이 아니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대중화를 반기는 입장이라면 ‘깊이’에 대한 고집이 ‘저들만의 세상’을 위한 것이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이와 깊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노력만이 지식의 박제화나 상업화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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