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9. 17:00

이모티콘처럼 우리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대신 전해 주는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리충족을 시켜주는 방송 프로그램들은 물론이고,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만한 웹툰, 나아가 다양한 상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 이입 콘텐츠들을 살펴본다.

감정(emotion)과 아이콘(icon)이 합쳐진 단어 이모티콘은 그 조어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부터 감정 표현의 도구로 만들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모바일 기기처럼 일일이 문자로 감정을 적어 나가는 불편함을 단번에 해결하기 위한 편의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때론 문자나 말보다 이모티콘 같은 그림, 애니메이션이 훨씬 더 감정 전달에 효과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 만나자고 문자를 보내왔을 때 과중한 업무 때문에 야근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잔뜩 서류를 쌓아놓고 열일하는 캐릭터가 들어간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는 게 훨씬 간편하고 효과적이라는 것. 하지만 이렇게 감정 표현을 이모티콘으로 대신하다 보니 점점 우리는 감정을 스스로 표현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어떤 감정을 경험하는 일도 이제는 직접 하기보다는 누군가의 경험을 통해 하려는 경향까지 생겨난다. 이른바 감정 이입 콘텐츠들이 점점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감정 이입 콘텐츠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이모티콘처럼 이미 존재했던 콘텐츠는 훨씬 더 세분화, 전문화돼 간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디자이너와 개발자라면 공감할 이모티콘’, ‘대학생 공감 이모티콘’처럼 특정 집단의 감정을 대리하는 이모티콘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화려하면서 심플하게 해 주세요”, “뭔가 2% 부족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같은 문구가 들어간 이모티콘들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감정 이입 콘텐츠들이 가장 많이 쏟아지고 있는 분야는 역시 방송이다. 유튜브의 1인 방송들은 물론이고 기성 방송사들의 콘텐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른바 ‘먹방’이나 ‘여행 콘텐츠들’, ‘관찰 카메라 영상들’은 모두 감정 이입 콘텐츠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이어트 때문에 못 먹는 걸 방송을 통해 풀어 주는 먹방도 있고, 시간과 여유가 없어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여행 콘텐츠들도 넘쳐난다. 이 둘의 결합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 나영석 사단이 만들어 낸 일련의 콘텐츠들이다. <스페인 하숙>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누구나 한번쯤 꿈꿔 봤던 곳에서 지친 순례자들에게 한식을 제공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떠나고픈 감정과 그 순례길에 대한 대리 경험 같은 것들이 이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다.

또 최근 들어 <나 혼자 산다>, <전지적 참견 시점>, <미운 우리 새끼>처럼 점점 급증하고 있는 관찰 카메라 형식의 프로그램들은 모두 현장에서 찍어온 영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며 토크를 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장 영상을 그냥 보여 주지 않고 이렇게 중간에 출연자들의 토크를 매개하는 건, 일종의 감상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장면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시청자들이 좀 더 공감하며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것.

 

이러한 감정 이입 콘텐츠들이 많아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미디어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져온 부산물이다. 사실 감정의 표현이나 그 수용은 어떤 식으로든 미디어를 통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그 미디어 역할을 했던 건 직접 대면해서 전해지는 말과 글, 그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이런 직접 대면 접촉의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대신 그 자리를 인터넷이나 모바일 같은 디지털 미디어가 차지하게 된다.
감정을 직접 표현하거나 누군가의 감정을 직접 수용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를 매개해 주는 이모티콘 같은 것들이 점점 하나의 언어처럼 등장하기 시작한다. 또 직접 부딪치며 강해질 수 있는 감정의 근육들은 이런 비대면 접촉 미디어 속에서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욕구는 크지만 직접 부딪쳐 그 욕구를 풀기보다는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 이를 대리 충족하려는 경향도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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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화나게 해도 직접 당사자와 풀지 못하고 ‘대신 화내 주는 페이지’나 ‘대신 욕해 주는 페이지’를 찾고, 갖고 싶지만 여건상 못 갖는 물건들을 이른바 ‘하울 영상(haul, 매장에서 쓸어 담듯 산 제품의 개봉 과정을 보여 주는 영상)’을 보며 그 욕망을 풀어내려 한다.
‘감정 대리 사회’는 미디어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흐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간에는 ‘감정 경제’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고도화된 디지털 속도의 반작용으로 ‘뉴트로(New + Retro)’ 같은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고 있는 것처럼 직접 대면을 통한 감정과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또한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서로 직접 기대야 완전할 수 있는 인간(人間)이니 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다. 대중문화를 통해 시대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숨은 마흔 찾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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