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17. 4
글 박지현 프로(정동은 ECD팀)
입사 4년 차, 대리 1년 차. 날마다 새로운 도전이었던 신입사원 시절이 어렴풋해지기 시작할 때. 업무 흐름에 점차 능숙해지고, 어쩌면 능숙해지고 있다고 착각할 때. 그럴 때 영로터스라는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아이디어
입사 동기이자 같이 여행까지 다니는 절친한 친구 정민희 프로와 함께하게 돼 더 들떴고 또 든든했다. 늘 합이 잘 맞는 우리였기에 이번에도 충분히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일단 한국의 시린 겨울을 벗어나 파타야의 강렬한 햇살을 맞는 것만으로 좋았다. 툭툭을 탈 때 자칫 방심하면 도로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그 허술함조차 스릴 있었다. 우리는 생애 첫 광고제를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실상은 다음 날부터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에 걸릴 뻔 했지만 말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계속되는 세션에 파타야까지 와서 덜덜 떨어야만 했다.
차가운 공기와는 별개로 세션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애드페스트의 Co-chairman인 Sagar의 ‘9가지 감정에 대한 이론’에 대해 다른 나라 참가자들이 각자 들려준 이야기들이라든지, 제일기획 이경주 CD님의 ‘Weapon for the Everyday Creative’ 세션에서 잡코리아 광고 사례를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영로터스 참가자들 모두가 웃음이 터져버린 건 꽤나 놀라운 경험이었다. 지역에 특화돼 있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이 사실은 대부분 보편적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좋은 생각들은 역시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통하기 마련이다.
과제가 주어지다
세션 내에서 의견을 나누고 점심,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영로터스 참가자들은 서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업종, 나이, 문화권까지 비슷하니 이질감도 없었다. 이름과 소속만 알고 나면 이미 오랜 친구 사이처럼 친근해졌다. 특히 아시아권 참가자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생각보다 꽤 높았다. K-pop, 드라마, 간단한 한국어까지 건네오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하나같이 “가지마~”라는 말을 알고 있었는데, 한국 드라마에 그 대사가 자주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신파적인가. 어쨌든 정작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K-culture의 덕을 본 순간이었다.
셋째 날, 크리에이티브 브리프가 발표됐다. 광고해야 할 대상은 ‘애드페스트’ 그 자체. ‘Create with a Swagger’라는 주제를 담아, 영 크리에이터들을 타깃으로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지속 가능한 캠페인을 제작하는 것이 과제였다. 오티를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드는 건 만국 공통 광고인의 직업병인가 보다. 종일 재잘대던 아이들이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점심을 먹는 내내 식탁엔 정적이 흘렀다.
당당히 프레젠테이션을 하기까지
우리도 딱히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이 애드페스트인지, 영 크리에이터스(Young Creators)인지, 디지털 플랫폼인지 혼란스러웠다.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인데, 12시간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아이디어조차 정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새벽 한 시, 더 이상 지체할 순 없었다. 캠페인 아이디어를 결정해야 했다. 밤 새우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제한된 시간 내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집중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따사로운 파타야의 햇살이 이젠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 아이디어 회의 중인 박지현 프로와 정민희 프로
열 다섯 팀 중 다섯 팀. 수백 명의 청중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파이널리스트 팀에 들었을 때, 그래서 기쁨보단 걱정이 먼저 앞섰다. 다행히 이번 해에는 다음 날까지 PT할 파일을 제출할 수 있었다. 반나절의 여유가 더 생기자 불필요한 부분은 빼고 메시지를 분명하게 정리했다. 예선 심사 후 이미 일본 팀의 점수가 월등히 높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만족할 만한 아이디어로 사람들 앞에 서고 싶었다. 정리가 되고 나니 그제야 여유가 생기고 스웩이 나오더라. 더 적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나중엔 충만한 자신감에 발표가 너무 허세스러워 보이진 않을 지 걱정될 정도였다.
▲ 자신감 있게 진행한 프레젠테이션
Create with a Swagger
상은 타지 못했다. 그래도 즐거웠으니 됐다. 허세스럽대도 할 수 없다. 애드페스트에 참가한 수백 명의 광고인 앞에서 우리는 당당히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자신감은 즐거움으로부터 온다. 즐거움은 오롯이 나다울 수 있을 때 온다. BBC에 생중계되는 줄도 모르고 당당히 걸어들어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부산대 켈리교수의 앙증맞은 딸 메리언처럼 말이다.
클라이언트를 어떻게 만족시킬까, 타깃을 어떻게 설득할까, 그 전에 스스로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다움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1등한 일본팀의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일본스럽다’고 했다. 칭찬의 의미였다. 클라이언트나 타깃보다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즐기면서 하는 게 보였기에 ‘Create with a Swagger’라는 주제와 잘 부합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팀 역시 우리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기에 수상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패가 아닌 근사한 경험이었고, 그렇게 커다란 과정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열정이 넘쳤던 영로터스 친구들
입사 4년 차, 대리 1년 차. 중요한 것을 잊기 쉬운 시기다. 클라이언트에게 잘 맞추는 것. 새로운 툴을 발견하는 것. 수상 실적을 올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언제나 나 다움을 잃지 말고 즐기면서 할 것을 이 곳 영로터스에서 되새기고 간다. 또한 다른 나라의 광고하는 또래 친구들과 진한 추억을 쌓은 것 또한 큰 소득이다. 같이 밤새 일하고 마시면서 대화하고 자극받는 시간이 좋았다. 다들 열정이 대단했고 그것이 서로에게 전해져 힘이 됐다. 다만 애드페스트 세션들과 아름다운 파타야를 둘러볼 시간이 부족해 무척 아쉬웠으니, 다음에 참관단으로 꼭 다시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도 내 최고의 파트너 정민희 프로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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