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쪽같이 속는 즐거움 | 제일기획 블로그
2019.06.05. 14:00

완벽한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현실이라는 배경 위에 추가적인 이미지와 정보를 덧입히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가상세계를 보여주는 융합현실(Mixed Reality). 실감형 미디어로 통칭되는 이러한 기술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토탈 리콜>, <매트릭스>, <마이너리티 리포트>, <킹스맨>, <어벤저스> 시리즈 등 수많은 영화에 조연으로, 때로는 주연으로 출연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와 달리 현실 속의 실감형 미디어 기술은 아직 ‘실감’이라는 수식어를 달기엔 부족하다. 사람의 뇌를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움직임을 즉각적으로 인식하고 조금의 지연도 없이 반응해야 한다. VR에서 한 컷의 정지 화면은 약 25억 개의 픽셀을 포함하고 있고, 초당 90개 이상의 프레임을 처리해야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실감 나는 VR 콘텐츠는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
기존의 무선 네트워크 환경으로는 360°로 에워싸는 고화질 이미지를 버퍼링 없이 전송하는 데 무리가 있었고, ‘디지털 멀미’라는 몰입을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콘텐츠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이용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지난 4월 국내 이동통신 3사가 상용화한 5G 네트워크는 LTE 대비 무선인터넷의 속도를 20배가량 높여 초고용량의 데이터도 초고속으로 지연 없이 주고받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네트워크의 진화를 발판 삼아, 기업들은 실감형 미디어를 알리기 위한 활동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KT는 영화 속 홀로그램 회의의 모습을 현실에 구현하면서 가상현실이 한발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마이클 잭슨 헌정 앨범 발매 기념 행사에서 5G 네트워크에 홀로그램 텔레프레젠스(Hologram Tele-presence) 기술을 접목시켜 약 9,50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LA의 음반 제작자를 상암동 기자 회견장으로 순식간에 불러들였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5G 스마트폰 모델인 갤럭시 S10 5G를 선보이며 스마트폰이 ‘손안의 미디어’에서 VR, AR 콘텐츠까지 자유자재로 즐길 수 있는 ‘실감형 미디어’로 거듭나도록 돕고 있다.

▲ 서울과 LA간 홀로그램 통신에 성공한 KT

 

5G 시대에 실감형 미디어와 융합이 기대되는 분야로는 현장감이 중시되는 스포츠와 공연이 손꼽힌다. 스포츠 팬이라면 거부하기 힘든 ‘직관(직접 관람)’의 매력…. 실감형 미디어는 이제 집에서도 경기장 1열의 감동을 느끼게 해 준다. 일본 소프트뱅크사는 자사의 프로야구단 경기의 VR 생중계를 시작했다. 선호에 따라 홈베이스 뒤, 1루, 3루 등 4가지 자리 중 원하는 곳을 고르고 VR 시청을 위한 헤드셋을 착용하면 내가 있는 곳이 곧 경기장이 된다.
팬들을 모두 수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좌석으로 ‘피의 티켓팅’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아이돌 콘서트를 VR로 전송하면 어떨까. 지난겨울, 영국 인기 밴드 원디렉션(One Direction)의 멤버 리암 페인(Liam Payne)은 음악 VR 플랫폼 MelodyVR을 통해 라이브 공연을 생중계했다. 연결 가능한 인터넷과 MelodyVR 앱, VR 전용 헤드셋이 있다면 매진 걱정은 접어도 된다. VR이라는 티켓으로 각자의 공간에서 공연장에 입장한 사람들은 객석은 물론 무대 위, 공연 중인 가수 바로 옆까지도 오가며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 MelodyVR을 통해 라이브 공연을 생중계한 리암 페인 Ⓒ MelodyVR

 

관련 기술이 활발히 적용되고 있는 분야로 쇼핑을 빼놓을 수 없다.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의 오픈마켓 채널 타오바오(Taobao)는 VR을 기반으로 제품 탐색부터 결제까지 가상세계에서 완료할 수 있는 쇼핑 플랫폼 ‘바이 플러스(Buy+)’를 구축한 데 이어, 융합현실을 활용한 쇼핑의 청사진을 선보였다. 본사가 있는 중국 항저우에서 지난가을 개최한 쇼핑 페스티벌 동안 300㎡의 미래 쇼핑 거리를 조성하고 넓은 공간을 오롯이 홀로그램으로 채웠다.
방문객들이 대표적인 융합현실 디바이스인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를 착용하고 공간에 들어서면 홀로그램으로 상품들이 등장한다. 이와 더불어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있는 제품의 상세한 정보는 물론, 다른 고객의 이용 후기까지 함께 투사된다. 손길에 따라 움직이고 테스트가 가능한 홀로그램 쇼룸을 통해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가상세계를 맛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 타오바오의 MR 쇼핑

고객과의 접점을 늘리고 충성도를 강화하는 데에도 실감형 미디어가 사용된다. 볼보의 VR 테스트 드라이빙 캠페인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가상현실 기술을 적절히 활용한 사례로 꼽힌다. 볼보는 SUV 신모델 XC90 출시 당시 시승 행사를 VR 앱을 통해 진행했다. 골판지를 접어 만드는 저렴한 VR 헤드셋 구글 카드보드에 스마트폰을 끼우면 신차의 시승을 위한 준비가 완료된다. 볼보는 매장에 방문하지 않고도 시승할 수 있는 프로모션으로 신제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고객 접근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덴마크의 장난감 제조 업체 레고(Lego)는 성인이 되어서도 변함 없이 레고를 사랑하는 고객들을 위한 스트리트웨어 팝업 스토어를 오픈했다. 이 상점으로 향하는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다. 오직 소셜 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 스냅챗의 스냅 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람에게만 의류 증강현실 매장의 문이 열린다. 레고를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가상의 세계에 숨겨 둔 것이다.

▲ 레고의 AR 팝업 스토어

 

저변을 더욱 넓혀나가기 위해서는 실감형 미디어가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어서는 안된다. MyndVR의 창업자는 매일 1만 명의 사람들이 은퇴한다는 것에 주목하고, 실버세대를 타깃으로 한 VR 플랫폼을 론칭했다. VR 세상에서는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이도 버킷리스트에 담아둔 여행지를 골목골목 누빌 수 있으며, 재즈 바에 편안히 앉아 프랭크 시나트라의 명곡을 감상할 수 있다. 쉬운 인터페이스에 담겨 있는 힐링 콘텐츠들은 고령층의 지적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이들의 은퇴 후 삶을 응원하고 있다.
구글 익스페디션(Google Expedition)은 VR과 AR을 활용해 학교 교실을 콜로세움, 만리장성 같은 해외 유적지로 변모시키고, 아이들은 선생님의 가이드에 따라 세계를 누비며 배운다. 뿐만 아니라 우주 공간, 몸속 세계와 같은 이색적인 장소를 학급 구성원이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실버 세대를 위한 MyndVR의 VR 플랫폼 Ⓒ myndvr.com

▲ 교실로 들어온 구글 익스페디션의 VR

기술이 정교화될수록 가상과 현실은 유기적으로 결합해 이전까지 만나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저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을 즐기면 된다. 트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들게 되는 마술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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