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距離)의 미학 | 제일기획 블로그
2019.07.05. 14:00

사진가 황규태의 <픽셀 레이디>나 화가 이길우의 <로널드 씨의 유람기>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거리 조정이 필요하다. 작품 앞에 너무 바짝 다가서면 픽셀이나 점이 무수히 반복되며 나열돼 있을 뿐이지만, 멀리 떨어지면 비로소 형체가 보인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적절한 거리는 필요충분 조건이다

지하철을 탄다. 운이 좋게도 빈자리가 많다. 이때 사람들은 십중팔구 맨 끝자리에 앉는다. 낯선 이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확보해야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퍼스널 스페이스’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누구나 주변의 일정 공간을 자신의 영역이라 생각하며 무의식적인 경계선을 긋는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느 만큼의 거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에드워드 홀에 의하면 만원인 엘리베이터에서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자신의 퍼스널 스페이스가 침범당해서다. 문화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거리는 대략 1미터가량이다. 이른바 ‘쩍벌남’이 못마땅한 것도 내 자리가 비좁아져서라기보다는 내 영역이 침해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퍼스널 스페이스가 반드시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또한 거리가 멀수록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월드컵 거리 응원을 떠올려 보자. 공유감을 느낄 때 우리는 낯선 이들과 어깨를 걸기도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한다. 요컨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20대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잡코리아의 조사에서 ‘직장 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으로 ‘전화벨이 울릴 때’(39.4%)가 2위에 올랐다. 신입사원이니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돼 그런 것이겠지만, 그 기저에는 다른 이유가 깔려 있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콜포비아(call phobia)’ 증후군을 겪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은 직접적 소통 방식인 음성 통화보다 문자로 간접적 의사소통을 하는 메신저 사용이 더 익숙하다. 이는 관계에 있어서 적정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식일 수 있다. 음성 통화를 할 경우 상대방의 뉘앙스에서 감정을 읽어내며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고, 내 감정 또한 그대로 노출돼 전달된다. 콜포비아 세대는 이런 소통 방식을 어렵고 피곤하게 느낀다.

여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한 초등학생이 “여친이 생기면 감정 소모가 많아서 안 사귀어요”라고 답했단다. 청년들의 결혼은 둘째 치고, 초등학생의 이성 교제조차 ‘감정 소모’로 인해 가로막히는 세상이다. 이런 현상이 오프라인 매장의 ‘비대면 서비스’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의 <비대면 서비스 관련 인식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무려 85.9%가 “점원이 말을 거는 곳보다는 혼자 조용하게 쇼핑할 수 있는 곳이 더 좋다”고 답했다. 65.7%는 “점원이 계속 말을 걸면 쇼핑을 더 하지 않고 나온다”라고 답했다. 이는 의도된 친절, 지나친 친절이 불편의 요소이며 누군가의 개입이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또한 스마트해진 소비자들은 점원의 정보 제공도 그리 반기지 않게 됐다. 이 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화장품 매장-드러그스토어-백화점 옷매장-대형마트-신발 매장’ 순으로 불편을 겪었다는 응답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응답자들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을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만 빠른 응대를 해줄 때”라고 답했다. 내가 원할 때만 접근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 때문에 최근 무인 계산대와 무인 점포 등 비대면 서비스가 호응을 얻으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단점이 없지 않음에도 비대면 서비스는 패스트푸드점과 영화관, 푸드코트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인간은 싫든 좋든 관계 맺기를 통해서만 살 수 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친절하고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려면 감정의 소모가 반드시 뒤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의 상중하를 결정짓고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심리학자 슈테파니 슈탈의 저서 『거리를 두는 중입니다』는 독일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은 어느 누구와 관계를 맺더라도 그 안에서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관계의 미학, 거리의 미학이 보편적 화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좋은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얻을 수 있다. 상대방의 거리감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거리감으로 일방적으로 다가서면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존중, 이것이 바로 적정한 거리의 지표가 아닐까. 브랜드와 소비자의 관계도 거리의 미학을 적절히 구사할 때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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