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5. 10:00

아무리 둘러봐도 역사상 이렇게 가볍고 촌스러운 문화가 주류 행세를 한 적은 없었다. 바야흐로 ‘B급 문화의 전성시대’다. ‘B급’은 ‘A급’이 얕잡아 보던 비주류이자 저급함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다양한 장르에서 B급 콘텐츠가 생산되고, 또 우리는 왜 이런 B급 정서에 열광하며 그것을 소비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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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영화의 문법을 사용한 주류 영화

‘B급 문화’ 하면, 대뜸 떠오르는 단어가 ‘할리우드 B급 영화’다. 미국 영화 산업의 불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저예산’, ‘끼워 팔기’로 제작됐던 B급 영화는 조악함과 저급함의 대명사였다. 이렇게 경멸적 시선이 뚜렷한 용어가 주류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1950~1960년대 프랑스 비평가들이 B급 영화와 감독들을 영화사(史)의 중요 인덱스에 포함시키면서부터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B급 영화는 변방을 벗어나 급기야 주류를 대체할 위치에 이르렀다. 천방지축 안티 히어로 <데드풀>은 기존 히어로들의 전형적 캐릭터를 전복시켰음에도 각광을 받았으며,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역시 전통적 스파이 영화의 공식을 철저히 외면하고도 한국에서 누적 관객수 600만 명을 거뜬히 넘어섰다. 이들 영화가 B급 영화의 문법을 일련의 장치로 활용했다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B급 정서의 완결판이란 평가 속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급기야 국내 영화계에도 파장을 끼쳤다. 그간 장편 상업영화의 소재로는 금기시됐던, 그야말로 B급 영화의 단골 소재인 ‘좀비’가 등장한 영화 <곡성>과 <부산행>이 힘을 합쳐 2000만 명의 관객을 스크린 앞에 모았으니 말이다. 아직 사례가 적긴 하지만 이쯤 되면 B급 문화가 ‘소수(마니아)의 취향’에서 ‘다중의 선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가벼운 재미에 초점을 맞춘 크록스의 <Superhero>. B급 정서 향유는 비단 국내의 일만이 아니다. ⓒcrocs

 

B급 문화 부상의 배경

이러한 B급 문화의 반란이 비단 영화의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우만 따져 봐도 그 사례는 열거하기 벅차다. 스스로 ‘B급’임을 자임한 한 개그맨이 결성한 그룹 UV의 성공은 가요계로 확장된 B급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이미 10년 전 데뷔한 그룹 노라조의 유쾌한 전조(前兆)가 있었고, “취향은 B급이지만 추구하는 건 A급”이라고 일갈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한국적 B급 정서로 전 세계를 강타한 희대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하대 받던 비주류의 대명사에서 탈피해, 추락한 권위를 조롱하며 주류와 동일선상에 자리한 B급 문화의 역습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략 “다양한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고, 정답과 완벽을 추구하는 사회에 반발하는 심리가 작동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 여기에 우리의 경우, 중산층 벨트가 얇아지면서 A급 문화를 지향하는 세력보다 B급 문화를 소비하려는 사회경제적 욕구가 강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다양한 미디어에 접근이 용이한 젊은 층이 청년 실업 등으로 극에 달한 일상의 긴장도와 불안감을 B급 문화 코드와 정서로 해소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문화 수용에 있어 상대적으로 능동적인 이들 밀레니얼 세대가 B급 문화의 주 소비층을 이루며 B급 문화 반란의 주도 세력이 되고 있는 셈이다.

첨단에 익숙한 이들이 왜 ‘아재 개그’라는 웃음 코드를 “나만 재미있으면 그만이지”란 판단 아래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걸까. 이들은 즐김의 주체가 ‘다수’가 아닌 ‘개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타인의 취향을 엿보거나 다수의 동의를 구하기보다 자신의 재미를 우선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즐기고 버리는 ‘짤방’이나 웹툰, 웹소설 같은 스낵컬처(Snack Culture)를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프레스티지 남성복 반하트 디 알바자와 GQ가 컬래버레이션한 광고 영상. 엽기적인 반전 코드가 웃음을 유발한다. ⓒGQ KOREA

 

뿌리 깊은 B급 문화와 정서

교훈적 메시지를 강조하며 점잔을 빼는 ‘고급함’보다 유치하고 세련되지 않은 ‘즐거움(Fun)’을 갈구하는 소비자의 B급 문화 향유 본능은 그 뿌리가 깊다. 판소리와 마당놀이, 탈놀이, 풍속화 등은 모두가 한국적 해학과 풍자를 담은 B급 문화의 고전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전통적 B급 문화를 향유한 주 소비층은 풍자와 해학을 통해 기득권층을 조롱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잊고 싶었던 다수의 기층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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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급 문화의 한국적 ‘원조’라 할 수 있는 마당놀이 ⓒwizdata/shutterstock.com

그러니 일상에 찌든 우리의 20~30대가 크레용팝의 직렬5기통 춤을 따라하고, 맥락 없고 형편없는 ‘병맛 코드’를 소비하며, 마치 초등학생의 솜씨 같은 웹툰에 열광한다고 나무랄 수 있을까? 차라리 현실적 억눌림의 방어 기제로 ‘B급 유머’를 찾아 스스로를 위무하고 있는 그들을 가엽게 여겨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SNL코리아>의 화장실 유머와 영화 속 다양한 B급 캐릭터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은 결코 유치하거나 가벼운 행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주류의 역습에 열광하는 대중의 환호성 혹은 절규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흙수저론’ 같은 탄식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혹자는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B급 문화가 빠르게 생성 소멸되는 하나의 트렌드라고 말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장르를 막론하고 생산되는 B급 콘텐츠, 온라인상에서 수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패러디물 등이 B급 감성으로 충만한 마니아 문화의 층을 두텁게 했고, 이제는 주류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궁금증은 원초적 본능에 가까운 이 B급 문화의 확산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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