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17. 8
마스크, 가방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다
한때는 그랬다.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황사를 잠깐만 견디면 화창한 봄날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황사 따위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미세먼지 수난 시대가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하랴 등교 준비하랴 바쁜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게 됐다. 무슨 대단한 낭만이 생겨서가 아니다. 유채색이어야 할 하늘이 시멘트 가루를 뿌려놓은 듯 무채색이 되면 마스크를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마스크가 가방 속 필수 아이템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호흡기 질환에 걸리거나 특별한 경우에만 쓰던 마스크가 일상용품이 돼 버렸다.
비단 날씨만이 아니다. 어떤 제품에서 무슨 성분이 검출됐다는 둥 누가 뭘 먹고 어찌 됐다는 둥 불안 심리를 자극하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식화’가 돼 버렸다. 예전에는 특별히 정의감이 뛰어난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폭염과 지진 등 자연재해, 그리고 일상 생활용품에서 검출되는 위해한 화학 성분에 대한 두려움은 환경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진짜 나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지구에 잠시 세 들어 사는 입주자
사람들은 ‘식물성’을 수동적이며 정적인 성질로 규정하고, ‘동물성’을 적극적이며 동적인 성질로 규정한다. 하지만 식물도 스트레스가 심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자살해 버린다. 식물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집에서 식물을 키워 본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 얼마나 크고 끈질긴지 잘 알 것이다.
식물도 그런 ‘동물성’ 사고를 할 줄 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인간 이외에는 누구도 그 말에 동의하는 존재가 없다. 흔히 ‘이름 없는 풀, 이름 없는 꽃’이란 말을 하지만 풀이나 꽃이 볼 때 인간도 이름 없기는 마찬가지다. 풀이나 꽃이나 비둘기나 인간이나 지구에 잠시 세 들어 사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세상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얘기다.
“농사나 지어 볼까”, 그 말의 본심
일이 잘 안 풀려 답답할 때 보통 관용구처럼 이렇게 말한다. “농사나 지어 볼까.” 농사가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잘 아는 어른들은 그 말을 질책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농사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 말 속에는 복잡하고 성가신 도시의 삶 대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누리고 싶다는 갈망이 담겨 있다. 그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백 번, 천 번 그 말을 내뱉은 사람들도 어지간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농사나’ 짓고 살지 못한다. 여태까지 누리던 문명의 이기를 어찌 포기할 것인가. 그래서 타협한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동시에 자연에 최대한 근접한 삶을 살아보자고. 지금 불고 있는 ‘에코 트렌드’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속내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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