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20. 1
장혜림 프로(리테일전략팀)
코흘리개 시절 TV에서 방영되던 애니메이션 시리즈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를 시청하던 그때의 나에게 2020년은 절대 다가올 것 같지 않던,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던 미래였다. 날아다니는 자동차,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지구, 로봇에 지배당한 인류 등 공상과학 영화에서 그려지던 2020년에 비하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30년 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개개인의 생활과 산업 전반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며, 소비자들의 구매 행태 역시 변화시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 하나로 내가 원하는 제품을 최저가에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하루 이틀 만에 받아보는 데 익숙해진 소비자들. 이들은 더 이상 단순히 물건을 사러 매장에 오지 않는다. 매장 방문에 소요되는 시간, 비용,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터치 몇 번으로, 그것도 매장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니 오프라인 매장의 방문율과 매출 저하는 뻔히 예견된, 불가항력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일주일에 몇 번이나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건을 사는지…. 신선 식품까지 새벽 배송이 되는 세상이니, 요즘 아이들은 엄마 심부름하러 슈퍼마켓 갈 일이 없어져 좋겠다 싶다.
이렇게 온라인 쇼핑이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과 편의에 이미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오프라인 매장이라고 해서 그 기대치를 낮추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온라인 매장에서는 얻을 수 없는 뭔가를 오프라인 매장에서 제공받기를 원할 것이다. 소비자들을 매장으로 오게 하려면 온라인 쇼핑에서 되는 건 당연히 다 돼야 하고, 온라인 쇼핑에서는 안 되는 것까지 되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 전통적 리테일러들은 크게 세 가지 방향성으로 생존을 위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첫 번째, 온라인 입지를 강화해 온라인 중심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변화시키고, 오프라인 리테일에 대한 의존도 및 투자를 줄이는 방향이다. 이는 단편적으로 신규 매장 오픈 수와 폐점 매장 수만 비교해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적인 추세이며, 장기 운영을 전제로 한 초기 투자 비용과 리스크가 큰 형태의 매장보다는 팝업과 같은 훨씬 가볍고 유연한 형태의 매장을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패스트패션의 대표 브랜드인 자라(Zara)의 지주회사 인디텍스(Inditex)의 경우 2017년 처음으로 폐점하는 점포의 숫자가 신규 점포 수를 넘어섰고, ‘돈이 되지 않는’ 점포들을 통폐합하는 한편 2020년까지 인디텍스 산하 모든 브랜드를 오프라인 점포가 없는 국가까지 커버, 온라인으로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의 경우도 기존 갤럭시 스튜디오 대비 판매 기능을 한층 강화한 팝업 스토어를 전개, 공항을 비롯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패션 포인트를 아우르는 세일즈 채널로써 적극 활용, 확장해 나가고 있다.
두 번째, 온라인과 오프라인 리테일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방향이다. 전통적으로 오프라인 매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판매였으며, 이에 성과 측정 척도 역시 단연 얼마나 많이 파느냐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의 가격 경쟁력과 빠른 배송에 밀려 판매 기능 하나만으로는 더 이상 존속이 어려운 상황이 됐고, 브랜드들은 오프라인 매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쇼핑이 온라인 쇼핑 대비 가지는 가장 뚜렷한 장점인 직접 제품을 만져보고 입어볼 수 있다는 점, 공감각적이고 몰입감 있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점을 적극 내세워 소비자들을 유인하고, 매장을 방문한 고객들이 그 자리에서 구매하지 않더라도 이후에 온라인에서 구매 의사 결정 여정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을 연계한 옴니채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한 예로 나이키는 맨해튼 5번가에 ‘하우스 오브 이노베이션(House of Innovation 000)’이라는 플래그십스토어를 오픈해 제품과 관련된 흥미로운 체험들과 Nike-id 같은 개인화 서비스, 온라인 구매 상품 매장 내 픽업 같은 옴니채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나이키 러닝 클럽, 지역 한정 상품들을 구비해 로컬 소비자들의 브랜드 로열티를 증진, 재방문을 유도하고 있다.
▲ Nike House of Innovation 000 뉴욕 플래그십스토어
ⓒ news.nike.com
스토리텔링과 제품 체험이라는 오프라인 매장의 장점은 온라인 퓨어 플레이어들이 오프라인 진출을 꾀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밀레니얼과 Gen Z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뉴욕 태생의 코스메틱 브랜드 글로시에(Glossier)는 온라인 스토어로 시작해 여심을 자극하는 베이비핑크, 화이트 컬러를 활용한 귀여운 패키징, 캐치한 태그라인, 일반인 모델들의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내추럴함을 선보이며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인지도를 얻었다.
또한 이러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철학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최초의 오프라인 플래그십 스토어를 2018년 11월 오픈했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밀레니얼과 Gen Z들이 글로시에 매장 입장을 위해 수십 미터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세계 각지에 특색 있는 팝업 매장을 운영해 본격적 오프라인 비즈니스 진출을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
▲ Glossier 플래그십스토어
ⓒ glossier.com
이와는 반대로, 오프라인 매장의 운영 효율성과 편의성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판매 기능에 충실하되 수익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들을 최소화하고, 소비자 입장에서도 결제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해 편의성을 제공하는 무인화 매장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존고(Amazon Go)를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신세계 이마트24 셀프스토어 등 매장 내 센서와 모바일 앱을 활용한 무인 매장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매장은 센서와 앱을 활용한 소비자 행동 및 구매 데이터 수집이 용이하다. 로컬 소비 패턴에 맞춘 상품 구성, 개인화된 프로모션 등 진화된 매장 운영을 가능케 한다는 점,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점주들의 운영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방해받기 싫어하는 요즘 세대의 특성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향후 지속적인 성장이 기대되는 시장이다.
마지막으로 오프라인 매장의 비즈니스 모델을 다각화하는 방향이다. 기존의 원 브랜드 원 스토어(one brand one store)가 아닌, 다른 브랜드의 숍인숍이나 팝업을 유치해 수익을 도모하고, 온라인 스토어 배송을 위한 물류 창고나 픽업 센터로 활용하기도 하며, 병원이나 은행과 같이 오프라인 방문이 수반되는 서비스를 유치해 매장 방문율과 체류 시간을 증대하기도 한다.
월마트(Walmart)의 경우 미국 내 19개 매장에 1,500sqf 규모의 월마트 케어 클리닉을 신설했으며, 2019년 9월에는 댈러스 월마트 슈퍼센터와 연결되는 10,000sqf에 달하는 규모의 대형 헬스센터를 설립해 문진, 엑스레이, 치과 치료, 정신 상담 등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해 소비자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미국 전역에 오프라인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을 적극 활용한 아마존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월마트의 묘책인 것이다.
▲ 댈러스 월마트 슈퍼센터
ⓒ corporate.walmart.com
이렇듯 브랜드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체형과 체질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 에이전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변화하는 소비자와 시장 생리에 대해 클라이언트보다 더 빠른, 더 깊은 이해가 없이는 ‘남들도 이미 다 하고 있는’ 또는 ‘남들은 다 하는데 우리는 안 되는’ 솔루션을 제공하게 될 것이며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다.
누군가는 “우리 클라이언트는 이런 부분에 대한 니즈가 전혀 없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변화하는 시장 환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아직까지 먼 나라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로보틱스 등 신기술, 고객 데이터를 활용한 고도화된 옴니채널 마케팅은 이미 누군가는 진행 중인, 현실로 다가온 이야기이다.
2020년은 경기 위축, 소비 감소, 그에 따른 마케팅 투자 축소,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요구로 그 어느 때보다 에이전시 입장에서 힘겨운 한 해가 될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언제는 안 힘들었던 때가 있었던가?
지금이야말로 낡은 개념의 에이전시 역할에서 탈피, 초(超)에이전시로서 체질 개선을 위한 최적의 시기이다. 지금의 업무와 우리의 역할이 앞으로 변화할 미래에도 유효할 것인지 반추하고,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어떤 역량을 내재화해야 할지 고민과 노력을 시작한다면 세계 Top 10 에이전시의 꿈도 머지않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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