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나는 광고의 ‘광’ 자(字)도 모르면서 제일기획에 무턱대고 입사했다. 그림 그리기만을 좋아했던 터라 당대의 핫 트렌드는 말할 것도 없고, 광고의 일반 상식조차 모르는 게 많아 입사 첫 일 년은 암흑 속에서 산 것 같다. 각종 광고제 입상자는 물론 광고회사를 들어오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한 준비한 동료들에 비하면 무슨 용기로 이 치열한 광고계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럼 난 무엇으로 이 힘든 싸움터에서 아직까지 크리에이터로 살아남아 있을까? 아마도 오랜 시간 서서히 내 몸에서 발달되어 온 ‘더듬이’ 때문인 것 같다. 남들은 그것을 ‘촉’이라고 하는데 난 촉보다는 오감으로 느끼는 더듬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광고주에게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이 프로젝트는 이렇게 하면 되겠어’ 하는 느낌이 섬광처럼 지나치는데, 그런 프로젝트는 대부분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물론 때로는 더듬이가 일동 차렷 상태에 빠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나는 대체로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모드로 진입한다. 그러다 우연히 본 사진이나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의외로 잘 풀리는 경우도 많다. 별다른 감이 오지 않을 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후배들이 있다. 그러나 보자기도 너무 꽉 묶으면 풀리지 않는 법. 머리를 싸매면 싸맬수록 늪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럴 때는 생각을 잠시 책상 속에 넣어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