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나는 광고의 ‘광’ 자(字)도 모르면서 제일기획에 무턱대고 입사했다.
그림 그리기만을 좋아했던 터라 당대의 핫 트렌드는 말할 것도 없고, 광고의 일반 상식조차 모르는 게 많아 입사 첫 일 년은 암흑 속에서
산 것 같다.
각종 광고제 입상자는 물론 광고회사를 들어오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한 준비한 동료들에 비하면 무슨 용기로 이 치열한 광고계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럼 난 무엇으로 이 힘든 싸움터에서 아직까지 크리에이터로 살아남아 있을까?
아마도 오랜 시간 서서히 내 몸에서 발달되어 온 ‘더듬이’ 때문인 것 같다. 남들은 그것을 ‘촉’이라고 하는데 난 촉보다는 오감으로
느끼는 더듬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광고주에게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이 프로젝트는 이렇게 하면 되겠어’ 하는 느낌이
섬광처럼 지나치는데, 그런 프로젝트는 대부분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물론 때로는 더듬이가 일동 차렷 상태에 빠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나는 대체로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모드로 진입한다.
그러다 우연히 본 사진이나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의외로 잘 풀리는 경우도 많다.
별다른 감이 오지 않을 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후배들이 있다. 그러나 보자기도 너무 꽉 묶으면 풀리지 않는 법.
머리를 싸매면 싸맬수록 늪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럴 때는 생각을 잠시 책상 속에 넣어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나의 더듬이에 꽤 만족스러워 하는 편인데, 더듬이는 경험에 의해 진화한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코스모스가 핀 길을 한 시간 동안 걸어 학교에 다녔으니 영락없는 시골 소녀였다.
자식의 미래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던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한 번도 공부하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틈만 나면 밖에 나가서 놀고 보고 싸우고 울고, 하루도 심심할 날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유용하게 쓰고 있는 ‘서정(抒情)성’을 그 시절 다 얻었던 것 같다.
대학에 가서는 돈 없이 해외 배낭여행도 가보고, 아르바이트도 물불 가리지 않고 해봤으며, 이 사람 저 사람 참 많이도 만나봤다.
그 경험들이 광고 일을 하는 지금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후배들에게 한 곳만 파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한 사람, 도서관에서 책만 들입다 판 사람보다는 세상과 만나 폭넓은 경험을 쌓은 사람이 광고인으로서
더 유리하다. 한 분야에 호기심이 독과점 되기보다 여러 채널로 분산시켜야 감성에 영양분이 공급된다.
또한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경험에도 시야를 열어두면 좋겠다.
이제껏 진행했던 캠페인을 보면, 주변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을 때 대체로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몇 년 전 한 아이의 탄생과 성장기를 다뤘던 다큐멘터리 형식의 캠페인을 제작했던 적이 있었다.
‘생명이 마십니다. 그래서 깐깐합니다’라는 카피를 내건 코웨이 정수기 캠페인이다.
당시 광고주는 정수기에 장착된 멤브레인 필터가 0.0001미크론 크기의 이물질도 걸러낼 만큼 우수한 필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내 머릿속에서는 0.0001이라는 생소한 숫자가 떠나지 않았다.
이 숫자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할지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어느 날 아이를 낳은 동생네 집에 갔다가 정수기가 생긴 걸 보게 됐다.
정수기 샀냐 물었더니 동생이 “아이가 생기니까 물이 신경쓰이네” 하는 게 아닌가.
돈오돈수, 바로 이거다 싶었다. 이후 ‘소중한 아이니까 단 0.0001의 나쁜 것도 들어가면 안 된다’는 콘셉트로 캠페인을 제작했다.
그 광고는 시리즈가 나가는 동안 반응도 좋았고, 대한민국 광고대상의 대상까지 받게 됐다.
사실 코웨이 정수기 캠페인은 대단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을 바탕으로 했다. 그 일상적 경험을 어떻게 반죽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잘 버무리기만 하면, 일상적 경험은 번쩍 하는 아이디어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마음으로 경험을 더듬어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물론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팀에서 ‘마녀’로 통한다. 나와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들면 마녀라고 부를까.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시길. 내가 후배들을 빗자루로 마구 못살게 구는 건 아니다.
단지 ‘이게 좋은 거야’라는 정해진 기준이 없을 뿐. 나는 어떤 때는 초록이 좋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빨강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후배들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늘 오리무중이다.
그래도 다행히 나와 함께하는 팀원들은 나보다 더 욕심들이 많아 언제나 불평 없이 최고의 크리에이티브를 향해 달려주니 고마울 뿐이다.
나는 ‘착하고 평범한’ 아이디어보다 ‘나쁘더라도 독특한’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지루한 아이디어는 병적으로 싫어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새로움에 대한 강한 의지는 이 시대의 크리에이터라면 누구라도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지금,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흉금의 한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하라. 그 길을 가는 용기와 힘은 스스로가 쌓은 경험의 더듬이에서 나올 것이다. (글/ 양영옥 마스터, E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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