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17. 4
글 원문재 프로(이문교 ECD팀)
풍운의 꿈을 안고 광고회사에 입사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애드페스트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한다. 하지만 보기 좋게 탈락. 그 후 청년은 태국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 청년은 머리 희끗한 중년의 모습으로 다시 파타야 해변가에 나타난다. 바로 애드페스트의 심사위원이 돼서 말이다. “네가 감히 날 물먹였어?!”라는 눈빛으로. 애드페스트 20주년을 맞아 잠시 떠올려본 상상이다.
애드페스트 20주년
아무것도 몰랐던 햇병아리가 어느새 광고계를 주름잡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을 시간. 700여 점 출품작으로 시작된 애드페스트가 3000여 점이 넘는 아시아 대표 광고제로 성장한 시간. 그 20년 동안 크리에이티브의 트렌드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TV와 인쇄 중심의 ATL에서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으로, 그리고 다시 모바일 플랫폼으로. 과연 다음 바통을 넘겨받을 주자는 누구일까? 애드페스트 2017에 그 힌트가 있을까?
모바일 네이티브 세대의 등장
애드페스트 2017의 테마는 ‘20 Years of Diversity’였다. 그야말로 다양한 카테고리 아래 다양한 크리에이티브가 펼쳐진 다양성의 향연이었다. 그중에도 역시 모바일을 활용한 광고들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주목할 점은 모바일이 더 이상 뉴미디어가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로 다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바로 새로운 언어를 쓰는 종족, 모바일 네이티브 세대들이 광고의 주요 타깃으로 급부상한 까닭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 잠금해제 능력을 자동 탑재했다는 세대들. 그들에게 ‘Mobile’과 ‘Life’는 아마 같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바이럴 필름과 모바일 부문에서 나란히 골드를 수상한 <Native Mobile Music Video>가 그 단적인 예다. TV나 컴퓨터의 가로 중심 화면에서 벗어나 모바일의 세로 화면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는 그 내용 역시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영상통화를 넘나들며 모바일 라이프 자체를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가로 화면에 익숙한 늙은(?) 세대들은 의문의 1패를 당했다고 한다. 절대 내 얘기는 아니다.
▲ Native Mobile Music Video
다이렉트 부문에서 금상과 은상을 수상한 <Safe & Sound Music Player> 캠페인 역시 모바일 네이티브의 인사이트를 꿰뚫었다. 길에서 헤드폰을 즐겨 쓰는 태국 젊은이들에게 LMG 보험회사가 새로운 뮤직플레이어 앱을 선물했다. 위험한 찻길에 접근하면 저절로 사운드가 줄어들어서 바깥의 소음을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위험하니까 보험에 가입하라는 말보다 새로운 뮤직플레이어를 권해주는 아이디어라니. 보험 영업사원 열 명보다 낫지 않은가?
▲ Safe & Sound Music Player
또 하나의 귀여운 아이디어는 NTT Docomo의 <Toilet Paper for Smartphones> 캠페인이다. 스마트폰의 세균은 화장실보다 5배나 많다. 그렇다 한들 우리 타깃들이 어디 스마트폰을 안 쓸 종족인가. 그래서 도코모는 나리타공항 화장실에 스마트폰을 닦는 조그만 두루마리 휴지를 달았다. 도코모의 공용 와이파이와 여행 가이드 앱 정보까지 적혀 있는 스마트폰 전용 휴지. “이것이 일본식 환대”라고 너스레 떠는 카피는 귀엽다 못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 Toilet Paper for Smartphones
‘설마 모바일이 내 카테고리까지 넘보겠어?’라며 여유를 부리던 아웃도어 부문조차 그랑프리를 모바일에게 빼앗겼다. 이쯤 되면 깡패 수준이다. 바로 호주관광청의 <Giga Selfie> 캠페인. 역시 여행 셀카를 빼놓지 않는 모바일 네이티브를 위한 아이디어다. 호주의 거대한 풍경도 찍고 싶고 자신의 셀카도 찍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큰 셀카를 찍게 해주는 것이다. 100m 밖에서 찍어주는 1기가짜리 빅 셀피(Big Selfie)라니, 그야말로 빅 아이디어(Big Idea)일 수 밖에.
▲ Giga Selfie
그럼에도 아이디어, 아이디어
그럼 모바일 네이티브를 위한 광고가 이번 애드페스트의 히어로였는가? 그건 아니다. 모바일과 전혀 상관없이 이번 애드페스트에서 큰 주목을 받은 작품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그랑프리, 골드, 실버를 쓰나미처럼 휩쓸어버린 <The Unusual Football Field> 캠페인이다. 집과 쓰레기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방콕 클롱 도이 지역의 자투리땅을 특별한 축구장으로 만든 것이다. 이 작고 삐뚤빼뚤한 축구장은 쓰레기로 채워졌던 쓸모 없는 공간을 아이들의 웃음과 즐거움과 땀으로 채워줬다. 태국 1위 부동산 개발회사 AP Thailand의 ‘공간이 삶을 바꾼다’라는 철학을 그대로 녹여낸 수작이었다.
특히 다른 나라에선 시도할 수 없는 오직 그들만의 로컬 인사이트였기 때문에 더욱 유니크하고 파워풀했을 것이다. Droga5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테드 로이어(Ted Royer) 역시 “로컬 인사이트 작품을 심사할 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말했으니, 다시 되새겨본다. 로컬 인사이트의 힘.
▲ The Unusual Football Field
두 번째는 골드 2개와 실버 2개를 거머쥔 제일기획의 < HEATTECH Window> 캠페인이다. 이번 애드페스트에서 제일기획은 총 14개의 본상을 수상해 역대 최다 기록을 갱신했는데, 이 캠페인이 한몫 제대로 했다고나 할까. ‘히트텍이라는 옷처럼 히트텍 광고도 실제로 고객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줄 수 없을까?’라는 발상은 지금까지 해왔던 제품 따로 광고 따로의 관성적인 크리에이티브에 일침을 가했다. 작년 겨울에도 우리 집 창문에 붙였던 그 뽁뽁이였는데, 히트텍 로고만 하나 붙여서 이런 기막힌 아이디어를 만들어버리다니. 아…! 살살 배가 아픈 것은, 비밀이다.
▲ HEATTECH Window
광고쟁이들이 여전히 해야 할 일
모바일 네이티브들도 언젠가는 광고 타깃의 VIP석을 다음 세대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고쟁이들은 하이에나처럼 또 다음 트렌드를 찾아 헤맬 것이다. VR 가상현실일까? AI 인공지능일까? Who knows? 중요한 것은, 그리고 다행인 것은,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은 20년 전에도, 지금에도, 먼 훗날에도 늘 똑같다는 것이다. 타깃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것. 시대적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뛰어난 인사이트 하나로 그랑프리와 골드를 거머쥔 위의 수상작들이 그 증거다.
그러니 광고인들이여, 어느 날 갑자기 영화 <콘택트>처럼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게 되더라도, 그리고 그(것)들에게 신형 우주선을 광고해야 하는 위기에 닥치더라도, 우리는 늘 하던 일을 하면 되리라. 외계인 인사이트 찾기. 흠, 일단은 사람이 사람에게 광고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자위하며, 다음 번 광고제 참가자에게 더 뛰어난 크리에이티브 트렌드를 찾을 수 있는 기회을 넘긴다. 기쁘게 받아주시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