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1. 18:00

지금은 누가 경쟁자이고 협력자인지, 누가 소비자이고 생산자인지 모호한 시대이다. 산업간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으며, 기업의 안과 밖이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경계가 무너진다는 말은 경계 안팎에 있던 것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런 시대에 외부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내부로 연결시켜 활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적극 활용해 기업 경쟁력을 키우고 있는 성공 사례를 살펴본다.

오픈이노베이션에 대한 선경험 

이노베이션, 즉 혁신(革新)은 ‘가죽을 벗겨 새롭게 한다’는 뜻이 담긴 단어다. 뜻을 새기면, 그로테스크하다. 그만큼 실천이 어렵다는 뜻일 게다. 하물며 ‘오픈[開]’이란 접두어까지 붙은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은 개념의 확장으로 더욱 혼란스럽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지난 2003년, “기업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이 신개념 용어가 등장한 후 가장 빈번하게 검색(구글 월별 검색 트래픽 결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란 사실이다. 왜 유독 한국인은 ‘열린 혁신’, 또는 ‘개방형 혁신’으로 번역 가능한 이 광의의 개념에 주목해온 것일까?

그것은 일단 익숙해서가 아닐까? 전후 우리 기업은 기술과 사업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 기업, 즉 외부로부터 모든 것을 흡수하는 ‘스펀지 성장’을 해왔다.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그것을 체득해 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익숙한 경험에 대한 지나친 관심, 또는 관성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기업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같은 기업이라 해도 사업별로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할 영역과 개방할 영역에 대한 전략적 판단부터 해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기술과 사업 분야의 글로벌 트렌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 어떤 스타트업과 협력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설득력 있는 조언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기업이 달성하고 싶은 결과를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실현시켜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인 건 확실하다. 많은 모범 사례가 있으니 말이다. 다만 오픈 이노베이션이 만능키가 아닌 이상, 그에 따르는 위험과 단점에 대비한 준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주요 기업들의 주력 분야가 혁신이 빠르게 진행되는 카테고리에 포진해 있고, 그만큼 새로운 성장 동력을 줄기차게 찾아야 하기 때문에 오픈 이노베이션에 대한 니즈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아무리 최고의 기업이라도 자급자족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는 외부의 힘을 내부와 연결시킬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들이 레드오션을 극복한 방법

빅스텝1▲ P&G는 ‘Connect + Develop’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외부 아이디어를 적극 연결하고 있다. 과자 표면에 그림 등을 인쇄한 ‘Pringles Prints’도 그 결과 나온 제품이다. ⓒpgconnectdevelop.com, pringles.com

P&G는 2000년 초, 그룹 전체가 휘청거렸다. 날마다 주가가 폭락하는 상황에서 2002년 CEO로 취임한 앨런 조지 라플리(A.G. Lafley)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강조하며 “우리가 얻는 이노베이션 중 50%는 P&G 외부에서 가져 오겠다”라는 ‘파격’을 선언했다. 이후 P&G는 줄곧 ‘Connect + Develop’라는 프로그램을 운영, 외부의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이런 적극적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탄생한 제품이 프링글스의 과자 표면에 인쇄된 그림이다. P&G는 프링글스 과자 겉 표면에 먹을 수 있는 잉크를 이용해 그림이나 유머 등을 프린트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수소문 끝에 이탈리아 볼로냐에 위치한 제과점에 그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받아들였다. 만약 내부에서 기술 개발에 들어갔다면, 자칫 수년이 걸릴 일을 ‘즉시’ 해결한 것이다. 내부의 아이디어와 외부의 기술이 연결된 오픈 이노베이션의 모범 사례다.

빅스텝2▲유니레버는 ‘Challenges & Wants’를 통해 솔루션을 보유한 기업들과 손잡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저개발 국가의 건강 증진을 위한 정수기 ‘Pureit’을 개발했다. ⓒunilever.com, pureitwater.com

P&G가 생존 여부가 결정되는 위기 상황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반전을 꾀했다면, 소비재 분야의 또 다른 거대 기업 유니레버는 일찍부터 오픈 이노베이션에 뛰어든 기업이다. 특이한 점은 유니레버가 자사 홈페이지의 ‘Challenges & Wants’를 통해 기업의 고민을 오픈하고, 솔루션을 보유한 파트너들을 모집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기업의 민낯을 공개하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다. 유니레버는 이런 개방적 연결을 통해 저개발 국가를 위한 정수기 ‘퓨어잇(Pureit)’을 개발할 수 있었다.

빅스텝3

▲ 제품으로 출시된 ‘Ellen Kooijman’s Female Minifigure Set’. 레고의 아이디어 소싱 사이트 ‘LEGO Ideas’에 업로드한 아이디어가 1만 명 이상의 서포터를 얻으면 검토 후 제품으로 생산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ideas.lego.com

그런가 하면 아주 드라마틱한 사례도 있다. 플라스틱 블록 장난감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를 생산하고 있는 레고는 MIT와 7년에 걸쳐 공동 개발한 제품의 핵심 기술이 해커들에 의해 공개되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앞서 지적한 오픈 이노베이션이 가진 함정에 덜컥 빠진 것이다. 하지만 이 치명적 사건은 비디오 게임에 밀려 레고와 멀어지고 있던 ‘마니아’를 다시 연결시키는 의외의 결과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레고의 경영진들은 외부 협력의 중요성을 깨닫는 교훈을 얻었다. 지금도 레고는 ‘LEGO Ideas’라는 아이디어 소싱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 레고 팬들로부터 아이디어를 받아 신제품을 개발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레고가 위기 속에서 교훈을 얻은 케이스라면, IBM은 스스로 ‘폐쇄형 혁신 방침’을 깨고, 거리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사례에 속한다. 2000년대 초반 그간의 고집을 꺾고 ‘Innovation Jam’이라는 프로그램들을 통해 안팎의 집단 지성을 연결, 문제 해결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진화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앞에서 언급한 사례가 전통의 강호 기업들이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레드오션을 극복한 경우라면,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기본적으로 ‘개방성’을 무기로 탄생한 기업들도 있다. 구글의 대표 서비스인 유튜브와 안드로이드가 과거 유망 벤처기업을 인수 합병해 성장시킨 사업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선험에 따라 이들은 기술과 사업에 있어, 향후 전략 방향과 맞는다고 판단되면 과감한 기업 인수로 큰 사이즈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파이자(Pfizer)나 머크(Merck) 같은 글로벌 제약업체들은 R&D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핵심 역량인 신약 개발의 일정 부분을 다른 제약회사나 바이오테크 스타트업, 대학 등 외부와 연결시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최 경쟁자와 협력자가 누구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시장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위에서 열거한 대표적 오픈 이노베이션 사례들의 특징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일단 오픈 이노베이션의 영역이 단순한 아이디어 채택에서부터 핵심 기술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업계 지형을 바꾸는 기업 인수도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들이 외부의 것을 내부와 연결시키는 데 중점을 두다가, IBM처럼 오히려 역으로 기술을 외부로 이전해 수익을 올리는 사업 모델까지 보여주고 있다. 역발상을 통한 오픈 이노베이션까지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모범이 될 만한 글로벌 기업들은 영역별(단순 아이디어 공모 vs 핵심 기술 및 사업), 방법별(Inflow vs Outflow), 그리고 사업별(기존 사업 vs 신사업)로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성능 좋은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최근 들어, 오픈 이노베이션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우선 오픈 이노베이션의 영역이 R&D 중심에서 비즈니스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으며, 연구소나 경쟁사 등 외부 기관 중심에서 B2C나 B2B를 포함한 고객 중심으로 옮아가고 있다. 이처럼 산업 간 혹은 경쟁 관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정 분야에서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전통적 관계도 무너지고 있다. 2010년 창업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샤오미의 경우, 소비자를 마케터로도 활용하는 신선한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고객의 로열티까지 확보하는 영리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장애물 뛰어넘기

앞서 혁신은 그 단어의 뜻처럼 실천이 쉽지 않다고 했다. 특히 우리의 경우가 그렇다. 미국 버클리 대학과 독일의 프라운호퍼연구소가 미국과 유럽의 대기업을 대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추진 실태를 함께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 중 78%가 오픈 이노베이션을 활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전기·전자, 정보통신 등 하이테크 분야의 기업뿐만 아니라 도·소매, 무역, 건설, 금융 등 로우테크 분야 기업도 폭넓게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경 밖에서는 이미 오픈 이노베이션이 중요한 경영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다른 기업들과 필요 역량을 결합해 시너지를 창출하기보다는 내부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핵심 역량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하며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으로는 윈윈하기 어렵다는 부정적 편견으로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위한 예산이 전혀 배정돼 있지 않거나, 배정돼 있다 해도 예산 규모가 작아 집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신중한 의사결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오픈 이노베이션 추진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실제로 이뤄지는 현장에서는 “폐쇄적 조직 문화와 부서 간 과도한 경쟁 때문에 오픈 이노베이션이 제대로 실행되거나 성공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오픈 이노베이션을 가로막는 장애물만 탓할 것인가?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은 “자금이 부족했고, 첨단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며, 계획이 없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어쩌면 열악한 환경이나 장벽 따위를 뛰어넘는 것이 진정한 오픈 이노베이션 정신일지 모른다. 스티브 잡스는 오픈 이노베이션에 있어, 과감한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몸소 보여준 바 있다.

2010년 초반, 아이폰의 진화를 고민하던 그는 스탠포드연구소에서 사람의 목소리로 실행되는 소프트웨어 Siri가 개발됐다는 기사를 보고 호기심을 갖게 됐다. 내부에서는 이제 막 개발된 Siri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스티브 잡스는 몇 주간의 협상 끝에 스탠포드연구소의 경영진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2010년 4월 Siri를 인수한다. 이후 Siri는 OS의 핵심 요소가 됐고, 아이폰 4S 이후의 모든 버전에 탑재돼 사용되고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유행어나 시끄러운 구호에 머물지 않고 소기의 결과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비록 작더라도 과감한 실행이 필요하다. ‘연결’을 도모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기 어렵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빌리면, “나는 연결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초연결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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