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미국 드라마 ‘빌리언즈(Billions)’에는 퍼포먼스 코치라는 직업이 등장한다. 정신과 전문의 출신의 웬디는 헤지펀드 회사에 상주하며 임직원들의 퍼포먼스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신적인 상담을 진행하는데, 연봉이나 직책은 최고 임원급이다. 수시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리스크의 부담과 성과의 압박을 견디며 일하는 직원들을 그녀가 어떻게 코치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수십, 수백억의 자금이 들어왔다 나가기 때문이다. 고도의 거래 자동화가 이루어진 이 회사에서는 직원 한 명의 마인드와 컨디션에 따라 엄청난 손실과 수익이 좌우되고, 그 결과 직원 한명 한명이 더 중요해진다.
개인과 성과의 연결점을 극대화하는 퍼포먼스 코치
드라마의 특성 때문에 다소 과장이 있긴 하지만 ‘퍼포먼스 코치’는 실제로 존재하는 직업이다. 해당 직업군의 특성과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구성원들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 역할이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았고, 일반 비즈니스에서도 퍼포먼스 코치를 채용하려는 회사가 생기고 있다. 아직은 심리 상담가와 혼동해서 쓰는 경향이 있지만, 개인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보다는 개인과 성과를 연결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비즈니스에서 퍼포먼스 코칭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건 자동화 때문이었다. 드라마 빌리언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열 명이 하던 일을 이제는 한 대의 컴퓨터가 훨씬 정확하고 빠르게 처리한다. 그리고 그런 컴퓨터 열 대가 무엇을 언제 얼마나 할지를 관리자 한 사람이 결정한다. 즉, 직원 한 명의 영향력이 백 배가 되었다.
신뢰와 자율 없이는 리모트워크도 없다
2020년에는 여기에 리모트워크 트렌드가 가세하면서 퍼포먼스 코칭이 더 중요해졌다. 대면하지 않고 스스로 일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일하는 시간과 성과의 상관관계도 거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근이나 재택근무를 할 때조차도 물리적인 ‘근무시간’을 기록하려는 관성은 한동안 남겠지만, 업무 시간에 의존했던 채용과 평가는 이미 수명을 다했다. 아직 출퇴근 시간에 집착하고 시간 단위 업무 내용만을 중시하는 회사라면, 조직의 리소스 효율 차원에서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90년대식 성실함의 강요가 2020년대의 조직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는 탓이다.
2021년, 팬데믹의 한가운데에 놓인 리더의 역할은 ‘시간 중심의 관리’가 아니다. 실무진의 업무를 리뷰한 후 의사결정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다. 이제 의사결정은 데이터와 시장이 한다. 팬데믹 이후의 리더는 ‘빌리언즈’의 퍼포먼스 코치처럼 구성원들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모호함과 변동이 디폴트가 된 새로운 환경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솔루션을 찾아내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신뢰와 자율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다.
회의는 사무실에서, 일은 집에서
이러한 리더의 역할 변화는 일하는 방식, 즉 우리가 성과를 내는 방식이 변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COVID-19 이후의 업무 환경은 빠르게 변했다. 그런 변화 중 가장 확실하고 임팩트가 큰 것은 리모트워크의 일상화다. COVID-19 이전까지는 외근이나 재택근무를 했어도 업무의 디폴트는 여전히 오프라인이었다. 새로운 정보는 사무실에 가야 제일 빨리 들을 수 있었고, 업무를 위한 대부분의 서류는 사무실에 있었다. 하지만 COVID-19으로 인해 업무의 중심은 빠르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졌고, 단순히 오프라인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온라인을 기반으로 재디자인 되고 있다. 이제 사무실은 생산적인 미팅이나 직원들의 사회적 욕구를 위한 옵션이 될 것이다. 개인 책상의 비율은 50~70% 수준으로 축소되고, 사무실에서 ‘내 책상’이란 개념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일주일에 많아 봐야 두세 번 정도 들르는 사무실에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책상을 둔다는 건 비효율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대신 개인 책상에 투자했던 비용은 홈오피스로 옮겨질 가능성이 크다. 협의된 가이드라인 안에서 더 개인화되고 맞춤화 된 업무 공간을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주지 인근의 코워킹스페이스나 위성오피스 이용료를 지원받는 것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개인이 집중하기 편한 곳에서 대부분의 업무가 진행될 것이다.
가족의 수만큼 필요한 방
물론 아직은 분위기로 보나 구조로 보나 집이 업무를 위한 최적의 장소는 아니다. 그러나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면 재택근무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도 변하고, 집의 구조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기능으로 구분된 현재의 방 개념은 개인별로 나뉘면서 가족의 수만큼 방이 필요하게 된다. 크기는 지금보다 작아지겠지만 일이든, 수업이든, 취미생활이든, 넷플릭스 시청이든 필요한 온라인 활동을 프라이빗하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미 이런 변화를 반영한 설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만큼 교통의 편의성 보다는 집 주변의 환경에 더 큰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 수도권 외곽에 있는 채광 좋고, 주변 조용하고, 자연 접근성이 좋은 집들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더 이상 집이 출근을 준비하고 퇴근 후 쉬는 곳만은 아니기에 내부 인테리어도 중요해지는데, 실제로 코로나 락다운 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집 내부를 리뉴얼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홍콩에서 프랑스 회사의 업무를 하다
이런 변화는 결국 채용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리모트워크의 일상화로 채용의 물리적인 범위가 확대되면 사무실에서 1시간 거리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회사에 지원할 수 있다. 아직은 출퇴근 기반의 고용제도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법도 시대에 맞게 개정될 것이고 머지않아 해외 거주자를 채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다르게 이야기하면 구직의 기회도 그만큼 확장된다는 의미다. 채용 전 과정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지고, 실제 업무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거주지 근처의 회사에만 지원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진다. 이제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구직자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러려면 영어 실력은 물론 온라인 협업 능력도 필수가 된다.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이런 변화가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지속될 것인지 묻는다. 나의 대답은 확신에 찬 “YES” 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일종의 진화에 가깝다. 빠르게 진행돼서 일시적인가 싶지만, 잠깐 왔다가는 유행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토대로 한 메가트렌드란 의미다.
백신이 발명되면 코로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경험한 새로운 업무 방식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업의 상황에 맞게 최적화된다. 스마트폰의 편리함과 익숙함을 모두 가진 우리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코로나로 변한 일하는 방식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최두옥
스마트워크 디렉터. 카카오의 전신인 ‘다음커뮤니케이션’과 공간비즈니스그룹 ‘토즈’에서 팀장으로 일했다. 스마트오피스 리서치를 위해 머물렀던 유럽과 미국에서 스마트워크를 경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스마트워크 R&D 그룹 ‘베타랩(BetaLab)’을 만들었다. 현재는 국내외 스마트워크 전문가들과 협업하면서 중견/대기업의 스마트워크 프로젝트에서 디렉터로 참여 중이다. 2021년 1월, 수많은 스마트워크 프로젝트에서 얻은 인사이트와 시행착오를 정리한 <스마트워크 바이블>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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