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8. 10:09

보디 체인지(Body Change)를 소재로 한 영화 <더 게임>에서 노인은 위험한 도박으로 젊은이의 몸을 얻는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혜로운 노인에게 청춘의 싱싱한 몸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만약 주어를 ‘기업’으로 바꾸면, 청춘의 몸을 가진 노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변화에 둔감한 전통 기업은 생존 경쟁에서 뒤처지기 쉽다. 때문에 전통 기업일수록 발빠른 변화 수용과 혁신으로 경쟁력을 획득해야 한다.

혁신 추구하는 장수 기업 늘어

한국 유가증권 시장의 상장기업 중 50% 이상이 설립 40주년을 넘겼다. 전 세계 기업 평균 수명이 15년(맥킨지컨설팅 보고서)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 기업의 저력으로 읽히는 수치다.

이 통계를 두고, ‘경제의 중심인 제조업의 고령화는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장수 기업의 연륜과 전통은 분명 기업 경쟁력의 일부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은 ‘혁신’의 가치가 더 중요해진 새로운 시장 환경에서는 ‘거추장스런 왕관’일 수 있다.

노인은 결코 청춘의 몸을 가질 수 없지만, 기업은 불편한 왕관을 버리는 순간 회춘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기업들이 이구동성으로 ‘리뉴얼(Renewal)’을 외치는 건 바로 회춘을 통한 불멸을 꿈꾸기 때문일 터. 삼성경제연구소가 2013년 내놓은 <글로벌 기업 경영의 7대 트렌드>에서도 ‘쇄신(리뉴얼)’이 첫 번째 사업 전략으로 제시돼 있다. 사업 구조와 브랜드 변신으로 활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리뉴얼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리뉴얼의 중요성을 증명하듯, 미국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를 구성하는 30개 우량 기업의 평균 연령은 100세가 넘는 고령이지만, 대다수가 ‘연륜’이 아닌 ‘혁신’이란 갑옷을 입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The World’s Most Innovative Companies)’ 순위를 보면, 상위 20개 기업 중 80%에 해당하는 16개 기업이 설립 30년도 안된 청년 기업이다. 따라서 다소 거칠게 정의하자면, 글로벌 시장은 혁신의 갑옷을 입은 장수 기업과 젊음의 창을 휘두르는 신흥 기업들의 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하게 시도되는 ‘리뉴얼’

탄탄한 조직과 시스템을 갖춘 장수 기업은 생리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변화를 불편해하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혁신을 취한 GE의 사례는 장수 기업이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하는 모범적 방식을 보여준다.

빅스텝1▲ GE는 거대 기업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FirstBuild를 설립,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있다. ⓒfirstbuild.com 

GE가 2014년 설립한 자회사 ‘퍼스트빌드(FirstBuild)’는 인터넷 공모 등 주로 외부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소규모 공장에서 신속하게 제품화하고, 대규모 유통망이 아닌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등을 통해 시장에 선보였다.

빅스텝2▲ GE가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인디고고를 통해 출시한 음료수용 제빙기

최근 개발해 판매한 음료수용 제빙기의 사례를 보면, 구상에서 제품화까지 걸린 기간은 단 4개월이었다. 비용도 기존 조직 내 개발 과정을 따랐을 때와 비교해 1/20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퍼스트빌드의 성과가 거대 기업 GE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극히 미미하다. 하지만 외부 조직을 통해 GE는 변화를 불편해하는 기존 구성원들에게 일종의 자극제를 주사한 셈이다. GE는 리뉴얼이 반드시 기존 조직이나 사업 구조의 대대적 수술을 통해서만 이뤄지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런가 하면 오랜 세월 축적된 브랜드의 명성을 스스로 잘라내고, 리포지셔닝과 리뉴얼에 성공한 케이스도 있다. 필립스 전자는 2013년 5월, 사명에서 ‘전자’란 꼬리표를 자르고, 경쟁력이 약화된 전자기업 이미지를 과감히 버린 뒤 조명과 의료장비, 그리고 칫솔 같은 소형가전에서 선전하고 있다. 언뜻 소극적 개명처럼 보이지만, 사업 구조 개선의 의지가 효과적으로 반영된 ‘덜어내기’다.

소규모의 지속적 리뉴얼이 합리적 방안임을 실천하고 있는 기업도 있다. 1800년대 초 창업한 듀폰(DuPont). 기업의 조상쯤 되는 이 장수 기업은 큰 리스크를 감내하지 않는, 작은 리뉴얼로도 지속적 혁신이 가능함을 역설한다. 듀폰은 지난 2010년부터 “매출액의 30% 이상은 반드시 최근 4년 내에 시도한 혁신에서 나와야 한다”는 경영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목표 달성 여부를 외부에 지속적으로 공표함으로써 스스로의 자극을 공인받고 있다.

빅스텝3_수정▲ 스마트폰 앱 서비스로 소비자에게 숙박업의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 힐튼호텔. ⓒwww3.hilton.com 

95개국에 4200개 이상의 호텔과 리조트 체인을 운영하는 힐튼(Hilton Worldwide)의 경우도 소규모의 리뉴얼로 효과적 혁신에 성공한 케이스에 속한다. 힐튼은 호텔 이용객이 자신이 머물 객실을 사전에 직접 고르고자 한다는 욕구를 스마트폰과 결합시켰다. 멤버십에 가입한 힐튼의 고객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 마음에 드는 객실을 직접 고르고, 사전에 체크인까지 할 수 있다. 고객의 변화에 집중해,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생아 스타트업을 배우는 대기업들

빅스텝4_수정▲ 글로벌 가구 기업 이케아는 이종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중저가 호텔 막시(Moxy)를 오픈했다. ⓒmoxy-hotels.marriott.com

리뉴얼은 목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시장과 고객의 시선을 맞추는 과정이다. 따라서 시장과 고객을 따라 ‘신사업’, 또는 ‘신비즈니스 모델 발굴’ 등 새로운 모색을 통해 리뉴얼의 동력을 얻는 기업들도 있다. 글로벌 가구 기업인 이케아가 중저가 호텔로 유럽 전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나 구글이 영국에서 검색 광고를 외상으로 판매하는 신용카드 서비스를 개시한 것은 이종업종의 경계선을 넘은 사례다. 리뉴얼이 규모와 무관하듯, 동종과 이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화의 대표적 증거는 굼뜬 행동이다. 반면 생기발랄한 청춘들은 민첩하고 기민하다. GE의 자회사 퍼스트빌드는 전통의 대기업이 몸집이 작은 스타트업의 바로 이런 특성을 도입한 것이다. 이처럼 다수의 글로벌 기업들은 스타트업 기업의 생동감에 주목하고 있다. 무너진 명성을 되찾기 위해 소니는 구성원들이 보다 자유롭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

빅스텝5_수정▲ 소니는 침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First Flight를 만들었다. ⓒfirstflight.sony.com 

2015년 7월, 소니가 ‘퍼스트 플라이트(First Flight)’라는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만들었다. 소니는 크라우드펀딩 방식을 활용해, 제품 개발에 대한 제반 의사결정을 대중에게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구성원들의 아이디어 중 잠재력 있는 아이디어를 웹사이트에 공개, 대중에 의해 개발할 제품이 선정되면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대중의 피드백을 받아 제품을 개발해 나가면서, 고객의 요구를 파악하기 위한 시장 조사, 경영진 보고 및 의사결정에 따른 지연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후원자들은 웹사이트에서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성공적으로 진행된 제품은 온라인 숍에서 판매된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아이디어가 제품화되는 시간을 단축하고, 사용자 경험(UX)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게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30년생인 유니레버는 2014년 ‘파운드리(Foundry)’ 라는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파운드리는 400여 개에 이르는 유니레버의 브랜드들이 스타트업 기업과 협업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빅스텝6▲ 스타트업과 교류함으로써 마케터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도록 한 유니레버. ⓒfoundry.unilever.co

유니레버는 이 플랫폼을 통해 스타트업 기업들과 협업,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고 제품과 서비스 개발에 필요한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마케팅 멘토링 활동을 통해 유니레버의 마케터들이 기업가 정신을 배우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일하는 방식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파운드리의 프로세스는 ‘Pitch→ Pilot → Partner’의 세 단계로 구분된다. 유니레버에서 스타트업 기업들을 대상으로 과제를 제시하면, 스타트업 기업들이 파운드리를 통해 아이디어를 제안한다(Pitch). 이어 유니레버가 그중 전략적 방향성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을 선정, 파일럿 프로젝트를 시작한다(Pilot). 파일럿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유니레버는 스타트업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투자를 늘려 프로젝트의 규모를 키운다(Partner).

스타트업 기업은 프로젝트에 참여해 초기 자금과 마케팅 전문가들로부터 3개월간 멘토링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스타트업은 자신들의 브랜드와 마케팅 전략, 제품 로드맵을 개발할 수 있다. 즉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해 상생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은 과연 리뉴얼의 구루일까?

코카콜라는 스타트업 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경험이 있는 기업가’에게까지 협업의 범위를 넓혔다는 점에서 확장된 개념을 제공한다. 코카콜라는 2013년 ‘파운더즈(Founders)’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스타트업 경험이 있는 기업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코카콜라의 관리자들과 함께 사업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게 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스타트업 기업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파운더즈에서 탄생한 첫 번째 스타트업 기업인 ‘Wonolo’는 매장에서 상품의 재고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코카콜라는 매장에서 재고가 떨어지는 일을 해결하는 과제가 10억 달러에 달하는 가치가 있다고 보고, Wonolo와의 협업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앱을 통해 파트타임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상시적으로 확보해 코카콜라의 제품을 매장에 보충하도록 한 것이다.

장수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이 이제 갓 태어난 기업의 일하는 방식이나 장점을 교훈 삼고 있다는 건, 어쩌면 아이러니일지 모른다. 일단 장수 기업과 스타트업 기업은 규모와 인적 구성 등 사이즈부터가 다르다. 따라서 무비판적 스타트업 배우기는 권장 사항이 아닐 수 있다. 다만 앞선 사례에서 봤듯, 회춘을 위한 여러 ‘키워드’ 중 하나인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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