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17. 3
글 편집실
#하나, 그런 얘기
대학 시절, 그는 미팅을 한 100번쯤 해봤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졸업 즈음 그는 자신의 화려한 미팅 경력(!)을 토대로 마침내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인문대생과 공대생은 이뤄질 수가 없어.”
이쪽에서 보면 저쪽은 너무 무미건조했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은 뜬구름을 좇는 몽상가였다. 그는 생각했다. 인문학적 감성이 충만한 인문대생과 기술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공대생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노라고.
하지만 ‘문과’ 뇌 따로, ‘이과’ 뇌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통섭이나 융합이 중요한 미덕으로 각광받는 시대에는 기존에 대립했거나 대립한다고 인식되던 요소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런 시대에는 <플랜더스의 개>를 보고 흑흑대는 공대생이나 메이커 운동(Maker Movement)에 심취하는 인문대생 모두 자연스럽다. 이들은 어찌 보면 ‘X형 인간’이다. 1990년대 ‘X세대’의 그 ‘X’가 아니라 곱셈 부호를 의미하는 ‘X’ 말이다.
#둘, 저런 얘기
구글 글래스가 등장했을 때 어떤 이들은 환호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뭔가 획기적인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구글 글래스는 사생활 침해 등의 문제를 야기하며, 무례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글라스홀(Glasshol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첨단 기술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두 팔 벌려 환영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벌인 대국에서 이겼을 때만 해도 그렇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보다 더 컸던 것은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고 위협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사실 급속도로 발전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R.U.R.)』은 대량생산된 로봇이 단합해 인간을 멸망시킨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해가 1920년도이니 이미 100년 전부터 사람들은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이러한 두려움은 그저 기우에 불과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셋, 이런 얘기
기술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혜택을 생각하면, SF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디스토피아는 ‘걱정도 팔자’이다. 우리 주변에는 소셜 로봇처럼 사람의 감정을 읽고 대응하는 기술이 있는가 하면, 캄테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면서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기술도 있으니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사람의 감성을 읽고,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기술을 위한 기술’일 뿐이다. 그런 기술은 자화자찬으로 끝나버릴 공산이 크다. 우리가 인정하고, 또 반가워하는 기술은 사람을 배려하는 기술, 사람의 감성과 조응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테크놀로지의 화살표는 ‘편의성’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가리켜야 한다. ‘테크놀로지 X 감정’의 결과 값이 클수록 우리의 삶이 더 다채로워질 테니 말이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기술에 감동받는다.
인간의 끊임없는 뇌발달과 기능성은 그만큼 눈부신 가술과 과학으로 입증해 주고 있지만 기사처럼 기술은 가술일뿐! 그 기술의 바탕엔 언제나 인간 태초의 바람처럼 숭고한 바람과 바람과 에너지가 함께 하기에 세상은 언제나 기술과 함께 나가리라 여겨집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의 발전!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