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2. 16:00

서구 미술사는 실재하는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출현했고, 이는 궁극적으로 사진이란 기계를 통해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서구의 회화가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려진 이미지에 불과하듯이 엄밀히 말해 사진 역시 인화지에 밀착된 허구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실재하는 진짜로 받아들인다.

실재를 더듬기 위한 매개체

사실 모든 이미지는 허구고 가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 버린 것을 뒤늦게 인간의 눈앞에 갖다 놓기 위한 대리물이자 실재를 대신하는 모조다. 그러나 인간은 그 허구적 이미지, 가짜를 통해 진실을 깨닫고 실재를 더듬는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이미지는 실재에 가닿기 위한 매개들인 셈이다.

전통적인 동양의 회화 역시 그러한 매개로 작동했다. 예를 들어 산수화란 그림은 실제 산수를 소요하는 대신 그것을 그림에 담아 방 안에 걸어두거나 펼쳐놓고 바라보면서 마치 현실 속 산수를 소요하는 듯한 경험을 위해 마련한 허구적 장치였다. 따라서 굳이 실제 그대로 닮을 필요는 없었고, 다만 실재를 연상하는 기호로만 작용하면 됐다. 그래서 선으로만 그려질 수 있었다. 그림자도 없고, 부피나 질량이 깃들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 존재하는 것 

알다시피 사진은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순식간에 포획한다. 따라서 사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찍을 대상이 마련돼야 하며 그것이 시간 속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사진은 대상과 시간을 동시에 겨냥한다. 이미 일상에 존재하는 이미지, 그러니까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다루는 사진은 우선적으로 대상을 발견하는 일이고, 그런 이후 대상을 프레임에 가둔다.

그런데 촬영 후에도 대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진 속에 들어와 박힌 대상은 어느 한순간의 것이기에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기이하게 걸쳐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찍은 사진 속의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였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이미 사라져 버린 어느 한순간을 애도하는 작업인 셈이다.

 

진짜와 가짜의 간극에 대한 질문

오늘날 동시대 미술에서도 사진이 지닌 허구적 특성은 적극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 대표적 작업의 예로 구성연의 작업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구성연은 실제 같은 가짜 사진을 촬영하는 작업을 선보이면서 진짜와 가짜의 간극에 대해 질문한다.

구성연의 사진은 찍은 대상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게 한다. 또한 작가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찍을 대상을 공들여 만든다. 그러나 그 대상은 시간의 흐름 속에 소멸될 것이다. 시간, 온도 등에 의해 이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재료를 사용해 대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구성연은 자신이 만들었기에 유일무이한 존재를 찍는 것이고, 나아가 그것들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순간 이내 소멸하기에 그 대상을 촬영하는 이유, 알리바이가 좀 더 분명해졌다. 아마도 작가의 방법론은 ‘왜 내가 그것을 사진으로 꼭 찍어야만 할까?’라는 의문에 답하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소멸과 존재에 대한 나름의 대응인 셈이다.

구성연의 작업은 모두 실내에서 이뤄진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사진으로 찍을 만한 대상을 찾으러 밖으로 나설 때 작가는 집에서 팝콘이나 사탕을 먹어 가면서 그것들을 가지고 꽃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짜 꽃을 진짜처럼 찍어 놓는다. 팝콘과 사탕은 꽃을 흉내 내고, 사진은 이를 그럴듯한 진짜 꽃처럼 위장한다. 그것은 사진에 인증의 기능이 있음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팝콘과 사탕은 변질되고 녹아 사라진다. 사진으로 담은 대상이 무로 돌아가 버린다.

생각해 보면 사라짐 위에서 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사물을 정말 명료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라짐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하며 그보다 더 나은 분석은 없다”고 말했다.

 

조각, 가짜에 담긴 진심 어린 희구

전통적으로 조각은 견고하고 영속적인 물질로 구현됐다. 인간의 몸을 단단하며 내구성이 강한 재료로 재현했다. 부드럽고 말랑거리지만 죽은 후에는 썩어가는 육신을 돌이나 나무, 금속 등의 견고한 물질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당연히 거기엔 시간의 지배를 받아 사라지는 육체를 영속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희구가 내재돼 있다. 부디 썩지 말고, 사라지지 말고, 영원히 산 자들이 축복처럼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이 조각의 역사이고 조각 재료의 역사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만든 다비드는 실제 인간이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본다. 가짜를 통해 진짜가 영속되기를 바란 것이다.

반면에 구성연은 단단하고 영원성을 보장하는 재료 대신에 설탕을 이용해 형태가 변하는 ‘조각’을 만들었다. 그것은 확고한 형태를 지닌 조각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시간의 추이에 따라 반응하는 조각이다. 구성연의 <설탕> 시리즈는 조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무너뜨린다. 물론 작가는 그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설탕이라는 재료를 선택했다.

작가는 황학동에서 발품을 팔며 이상한 화병과 접시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이 장식용 화병들은 외관이 화려하게 치장돼 있다. 이런 화병들은 유럽 문화권에서 기원한 원본들을 모방하고 있는 짝퉁들이다. 유럽의 궁전이나 귀족의 저택 등에 사용되던 것들을 흉내 낸 이 가짜들은 이런 물건을 선호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아마도 카페나 음식점, 혹은 집 안의 어느 구석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맥락 없이 놓인 그 화병들은 그저 키치일 뿐이다.

구성연 작가는 수집한 화병으로 거푸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설탕을 165℃로 끓여 녹여서 부은 후에 이를 떠냈다. 그리고 촬영을 했다. 사진을 보자니, 달고나 만들기나 설탕 뽑기의 추억이 어른거린다. 설탕으로 만든 화병은 공기, 온도, 시간 등으로 인해 변화한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공기, 온도와 접촉해 산화와 부패, 발효의 과정을 겪는다. 이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또는 변하지 않길 원하는 바람을 덧없이 깨는 일이다.

설탕은 달짝지근한 음식이며 녹을 때는 매우 끈적거린다. 그것은 욕망과 무척 닮았다. 사랑도 그렇다. 달콤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반짝거리지만, 이내 끈적거리고 질척인다. 얼마의 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결국 구성연이 사탕으로 만든 꽃이나 설탕으로 만든 화려한 병들은 모두 욕망과 사랑에 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부재는 존재를 긍정하게 만든다

존재와 부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고체였다가 서서히 녹으면서 액체가 되는 설탕의 물질성을 이용하는 작업으로 가시화된다. 결국 구성연의 사진은 시간의 밀도를 통해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존재와 부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진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생명이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마음도, 열정도, 욕망도 모두 그렇다. 그러니 이 사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종국에는 사라진다는 자명한 사실, 우리가 보는 시간은 결코 고정시킬 수 없으며 다만 흐르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켜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소멸의 과정은 역으로 이 현재를 충실히 긍정하는 마음으로 기울게 한다. 맹렬히 사라지는 현재의 순간순간을 그저 충실히 겪어내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쓸모없는 화려한 장식과 달콤함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URL 공유 인쇄 목록

소셜로그인 카카오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