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20. 4
박진수 프로(소셜팀)
유튜브가 ‘대세’로 떠오른 이래, 유튜브 콘텐츠의 주류는 ‘재능인’이었다. 뛰어난 재능이 있는 콘텐츠 제작자 겸 진행자가 본인의 멋진 능력을 뽐내거나 자신의 기량을 시청자에게 가르쳐 주는 콘텐츠.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UCC라는 이름의 1인 미디어에 익숙해진 시청자들도 이러한 콘텐츠를 즐겨 소비했다.
하지만 2017년 즈음부터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영상 촬영에 별다른 목적이 없어 보이는 콘텐츠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브이로그’라 불리는 이 콘텐츠는 <대학생의 공부 일기>, <피시방 야간 알바생의 하루>처럼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타이틀을 걸고 구독자, 특히 유튜브의 주류를 이끄는 밀레니얼들의 이목을 끌었다.
한때 온라인 영상의 대세는 ‘짧고 빠른 호흡’이었다. 밀레니얼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재미있는 다른 콘텐츠가 온라인상에 얼마든지 있으므로 영상을 길게 만들면 초반 몇 분만 보다가 금세 싫증을 느끼고 다른 영상으로 재핑(zapping)한다. 이 때문에 ‘텐션을 떨어뜨리지 않고 단숨에 영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성공하는 콘텐츠의 공식이었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영상 플랫폼에 익숙해지고 무선 데이터 요금 단가가 낮아짐에 따라 긴 영상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2017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유튜브 노동요’는 1시간이라는 긴 재생 시간에도 불구하고 “업무 보는 내내 틀어 뒀더니 정말 집중이 잘 되더라”는 입소문을 타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일반인이 본인의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브이로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기능을 뽐내거나 가르쳐 주려는 목적이 아니므로 핵심만을 간추리기 위한 편집이 없었고, 단순히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므로 스튜디오 조명이나 고가의 카메라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재미없이 로봇처럼 공부하는 모습만 보여 주기 위해’ 만든 <노잼봇> 계정처럼 책상 앞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설치하고 공부하는 모습만 찍어 올려도 셀럽에 준하는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
※ 브이로그는 비디오(video)와 블로그(blog)의 합성어로, ‘비디오 형식으로 기록한 블로그’라는 것이 통상적 해석이다. 해외에서는 기업이나 전문 미디어가 아닌, 개인 사용자가 영상으로 기록한 리뷰, 정보, 일상 등을 모두 브이로그로 분류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개인이 특별한 주제나 정보 없이 본인의 일상을 기록해 공개하는 영상을 브이로그라고 특정한다. |
▲ <피시방 야간 알바생의 하루>라는 타이틀을 건 ‘아현Ahyun’의 영상
▲ <같이 공부해요>라는 타이틀을 건 ‘노잼봇Nojambot’의 영상
물론 밀레니얼들이 단순히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재미를 느끼고 구독 버튼을 누르는 것은 아니다. 최근 밀레니얼들이 자주 시청하는 브이로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브이로그 콘텐츠가 특별한 이유는 그 특별하지 않음에 있다. 브이로거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고, 구독자는 그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잠깐 반짝이는 순간을 찾아 본인의 일처럼 즐거워한다. ‘성호육묘장’은 농촌에서 농사 짓고 가축 기르는 일상을 촬영해 업로드하는 유튜버다.
어느 날 밭에서 새끼 두더지를 잡은 그는 영상 속에서 정감 어린 목소리로 “원래는 밭을 망친 두더지를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귀여워서… 차마 그러진 못하겠다. 밭에는 말고 산에다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밀레니얼들은 농사일 가운데 발견한 두더지의 귀여운 모습과 차마 두더지를 해치지 못하는 농부의 여린 마음에 열광했다.
▲잡은 새끼 두더지를 차마 해치지 못하는 ‘성호육묘장’의 영상
바이럴 마케팅과 함께 성장한 밀레니얼 세대는 온라인의 모든 정보를 일단 의심하고 보는 성향이 있다. 그들이 커뮤니티에서 늘상 찾는 ‘인증’이나 ‘실화’는 셀럽이나 SNS 인플루언서가 게재하는 온라인 콘텐츠들이 대부분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한 편집 없이 담담히 일상을 비추는 브이로그에 대해서만큼은 특정 의도가 없다는 브이로거의 진정성을 믿는다. 긴장의 배리어를 낮추고 크리에이터가 전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리하고 집안일 하는 심플한 내용으로 꾸며졌지만, 협찬이나 바이럴 의심 없이
두터운 팬층을 거느린 ‘로하Roha’의 일상 영상
밀레니얼들이 브이로그에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을 그리기 때문이다. 브이로그가 인기를 끌기 전 대부분의 유튜브 콘텐츠들은 보는 재미는 있으나 쉽게 공감하기는 어려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브이로그에서 그리는 일상의 모습들은 나 또는 주변 지인들이 충분히 겪을 법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어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브이로거의 모습에 비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박막례 할머니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니어 유튜버다. 박막례 할머니와 함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김유라 PD는 저서에서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 채널의 두 가지 원칙은 첫째, 할머니가 즐거울 것, 둘째, 할머니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연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담을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유라 PD의 원칙처럼 할머니는 본인이 즐거운 영상을 찍고 있다. 물론 <달고나 커피> 편처럼 짜증스러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역시 인위적으로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고 있다. 박막례 할머니의 채널은 3년 동안 구독자 122만 명을 넘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박막례 할머니는 이에 힘입어 지난 2019년 5월, 구글 CEO인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를 만나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는 “박막례 할머니의 작업은 나와 여러 크리에이터들에게 영감을 준다”고 말했다.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대단한 기예가 없어도 내가 즐거워서 일상을 담는 브이로그는 이렇게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영향력을 행사해 나갈 것이다.
▲구글 I/O에서 순다르 피차이를 만난 박막례 할머니 영상
+ 기업에서도 눈여겨보다 브이로그의 이런 특징에 힘입어, 최근 기업들도 앞다퉈 기업 공식 채널을 통해 브이로그 콘텐츠를 올리고 있다. 특히 기업들은 밀레니얼 세대인 신입 사원들을 통해 자사의 비전, 복지, 주요 업무 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이는 소통을 중시하는 회사라는 인상을 심어줌과 동시에 더 우수한 인재들이 자사에 지원하도록 하는 홍보 효과를 거둔다. 하지만 기업이 제작하는 브이로그는 보안이나 홍보 목적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방향성을 어느 정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브이로그의 가장 큰 특징인 ‘진정성 있는 현장의 모습’과 배치되므로 수용자들이 메시지를 거부하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브이로그를 자사 홍보 매체로 활용하는 기업들은 일관된 메시지의 방향성과 성과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도록 항상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제일기획 임직원 브이로그 <제일기획 신입사원의 하루>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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