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9. 15:55

공감(共感)은 시대의 화두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감정을 내가 같이 느끼고, 나의 감정도 상대방이 같이 느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것이 중요할까? 어려운 상황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참여를 이끌어 내는 소통과 공감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통과 공감은 말이 쉽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왜 그럴까? 더 좋은 의견을 내지 못해서? 더 노력하지 않아서? 그보다는 의외의 요인에 우리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A와 B 두 개의 안이 있다. A안은 100%의 확률로 50만 원을 잃는다. B안은 25%의 확률로 200만 원을 잃고, 75%의 확률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어떤 안을 선택하겠는가?”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B안을 선택하겠다고 응답한다. 사람들은 확실한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 싫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더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는 모험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의 이론이다.

하지만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A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방법이 있다. 아까처럼 A안과 B안을 동시에 내놓지 않고 순서를 정해 하나씩 제시하면 된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우선 B안의 상황을 먼저 설명한다. 그러고는 잠시 그 사람을 가만히 둔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2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잃을 때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 상상을 해 본다.

상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어떤 싫은 것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거나 심지어 몸서리치곤 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200만 원을 잃는다는 상상을 일정 시간 해 보면 당연히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은 욕구도 커진다. 이때 A안을 대안의 형태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 “A안을 선택하면 B안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이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꺼이 A안을 받아들여 B안의 상황을 피하겠다고 응답한다. 사람들이 확실한 작은 손실을 받아들이겠다고 설득된 것이다.

 

상상을 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면 내가 원하는 A안에 대해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 나와 같아진다. 즉 공감이 일어난 것이다. 몇 개의 대안을 놓고 그중 더 합리적인 안은 이것이니 그것을 고르라고 하는 식의 양자택일식 강요는 설득이 아니다. 설득 대상자는 작은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으니 자연히 반감만 생긴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설득하는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어리석은 방법이다.

설득과 협상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할 시간’을 줌으로써 오히려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결과에 더 빨리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와 상대방이 같은 정서를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설득이다. 왜냐하면 설득의 가장 중요한 기저에는 공감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감은 상당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를 통해 더 얻을 수 있게 된다.

굳이 한마디 첨언하자면 보험도 이런 전략을 깔고 있다. “A와 B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가 아니라 “A를 선택하면 B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험이니 말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도 공감이다. 대학 시절, 아무리 봐도 그리 대단한 매력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늘 주위에 사람이 많은 선배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선배의 데이트에 불청객으로 낀 적이 있다. 그 선배 커플과 나, 이렇게 셋이서 영화를 봤으니 눈치깨나 없던 시절이다.

일단 영화는 매우 슬펐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건 물론이고 엔딩 크레딧도 거의 다 올라갔는데 선배 커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왜 나가지 않는지 슬쩍 물어보려던 참에 선배가 눈짓으로 우리가 앉은 줄 통로 쪽을 가리켜 봤더니, 관객 한 사람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우리가 나가려면 그 사람이 일어나야 했다. 그 선배는 기다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낯모르는 사람이 다 울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그 사람을 방해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왜 이 선배를 따르는가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공감은 상대방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방해하지 않고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가장 크고 소중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시간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공감임을 잊지 말자.

 

남편이 잘해 주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성실하냐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부부 생활에 큰 불협화음은 없냐는 질문에도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대답한다. 부인이 이렇게 대답한다면 별 문제없이 잘 사는 부부다.

그런데 중년을 넘어 노년기로 들어갈 즈음에 남편이 사망했다. 좋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부인은 이제 남은 삶이 불행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다. 몇 달의 짧은 애도 기간이 끝난 후 혼자 남은 부인은 전보다 친구가 많아지고 건강도 더 좋아진다. 삶에 활력이 넘친다. 약간의 재산만 있다면 말이다.

먼저 간 남편 입장에서는 서운하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이는 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1980~90년대 흔히 관찰되는 결과였다. 왜 이런 당황스러운 현상이 발생한 걸까?

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그 좋은 남편들은 부부로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나 난관이 일어날 때마다 부인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공통적인 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문제가 생기면 가장으로서 훌륭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지나쳐, 그 문제를 어떻게 할지 동반자인 부인과 상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표피상으로는 부인을 위한 것 같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다. 문제 발생 시 중요한 것은 해결이라는 결과다. 하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만들어 낼지를 자신의 파트너와 상의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관계의 덕목이다.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같이 상의하지 않은 해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공허하고 무기력한 마음을 상대방에게 느끼게 할 뿐이다.

한번쯤 되돌아보자. 공감을 강조하고, 공감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시간과 말을 상대방에게 충분히 주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결과가 좋을수록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큰 상처만 안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를 공감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김경일은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며 국내의 대표적인 인지심리학자이다. <어쩌다 어른>, <속보이는TV 人사이드>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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