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번 쉬크의 진수를 보여줄 모카 비알레티로 뽑은 아로마가 스트롱한 필링….’
여러분은 이 문장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으신가요? 최근 패션잡지 등에서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조사와 서술어만 우리말을 붙인 사례인데요.
이런 비문(非文)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생겨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죠.
그런데 만약 일상 속 언어가 이렇다면 어떨까요?
우리 주변에는 일상적인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해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 온 탈북자들입니다.
가깝지만 먼 타자가 된 사람들
“같은 민족인데,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단어 차이가 그렇게 나겠어?”라고
반문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남북 분단 70년, 강산이 무려 7번이나 변했습니다.
그동안 북쪽은 말 다듬기 운동으로 무조건적 한글화를 추진했고, 남쪽은 글로벌화를 비롯해
디지털이 스며든 사회적 맥락에서 정체불명의 외래어, 외계어, 신조어가 넘쳐나는 상황입니다.
북에서 한의사였던 한 탈북자는 남측의 배려로 다시 한의사 시험을 볼 기회를 얻었다고 합니다.
‘수천만 리 목숨 걸고 왔는데, 이까짓 시험이 뭐가 어렵겠어?’하며 야심차게 도전했지만,
단어의 어려움 때문에 수차례 좌절했고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대한민국 한의사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만, 문제는 남북 언어 차이가 작지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급작스러웠던 독일의 통일도 사실 동서독 방송을
상호 시청했기 때문에 언어 차이가 총론적으로는 없었다고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오면
미세한 용어 차이로 인해 동서독 취업률과 학업 성취도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과연 단어 이해의 어려움이 미미한 문제고, 개개인이 필사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로만
그냥 치부해야 할까요? 특히 학업을 하고 있는 탈북 청소년들은 더 기막힌 사연들이 많습니다.
수업 시간 교사의 이야기나 친구들 간 대화를 눈치껏 짐작은 하지만, 정작 이해는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점점 소외되고 적응하지 못해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일상어의 30~40%, 전문 용어의 60% 정도가 남북 간에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저희가 인터뷰한 학생들은 노력해도 안 될 것 같은 커다란 언어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외국 유학생이나 난민들이 겪는 소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통일 한국을 위해 먼저 온 미래이며, 같은 형제자매,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 미래를 만나다
국내에서 탈북 학생들을 ‘먼저 온 미래’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탈북 학생들 교육을 주제로 하는 선제안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도중 뜻밖에도 말은 대부분 알아듣는데,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2012년 국립국어원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탈북민들이 용어의 절반 가까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지점이 글동무 프로젝트의 출발점입니다.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에서 모국어로 공부하면서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다면
교육의 성과에서 격차가 날 것이고, 공평한 기회를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남북한 언어 이질성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것은 통일 이전의 한국 내 작은 통일에 기여하는 일이고, 커뮤니케이션에 업(業)의
능력을 갖고 있는 제일기획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글동무에 대한 소개 메시지
이러한 관점에서 제일기획은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사회공헌사업을 시작했고,
임직원들의 노력으로 글동무 애플리케이션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글동무라는 네이밍은 글을 읽을 때 모르는 용어를 친구처럼 편하게 물어볼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친근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남북한을 자유롭게 오가는
비무장지대 서식 동물들로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글동무
글동무를 기획하면서 염두에 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쉽고 편리해야 한다는 점, 또 하나는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광학판독기술(OCR)을
적용해 모르는 단어에 갖다 대면 바로 알기 쉬운 단어나 표현이 제공되도록 했습니다.
또한 지속가능한 참여를 위해서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끝나는 사전이 아니라, 모르는 단어를 계속 올리고,
자기가 아는 답도 올릴 수 있게, 스스로 발전 가능하도록 집단지성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화석처럼 죽은 사전이 아니라, 계속 진화하는 살아 있는 사전이 되도록 한 것이죠.
특히 탈북 학생들의 직접 참여로 참여 확대와 재생산을 가능케 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남한의 일상생활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소소한 언어생활 사례를 ‘이달의 단어’라는
팝업 형태로 넣어서 재미 요소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 등 제일기획의 임직원들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해 글동무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글동무의 자랑거리가 한 가지 더 있는데요. 글동무에는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이 참여했습니다.
교육 봉사 단체인 드림터치포올 봉사자 분들과 글동무의 취지에 공감한 탈북 현직 선생님들,
그리고 탈북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참여했으며 제일기획 임직원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기부하며
글동무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줬습니다.
카피라이터는 단어 활용 예문 작업에 참여했고, 아트디렉터는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기꺼이 그렸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앱을 들고 직접 탈북 학생들의 대안학교를 찾아가서 앱 시연 설명과
더불어 진로 상담도 진행했습니다.
▲ 제일기획 임직원들이 탈북 학생들에게 글동무 사용 방법을 교육하고 있다.
글동무가 바꿔갈 세상
‘우리의 소원’ 통일이 최근 들어 먹고 사는 문제로 소원해진 느낌입니다.
동서독 통일을 부러워하면서도 막대한 통일 비용에 대해 현실성을 지적하기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통일은 대박이라는데 우리의 준비는 어떠한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탈북 학생들과 친해지면서 그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알게 됐습니다.
“이거 북한에서는 뭐라고 하니?” 자신들은 대한민국 사람인데, 자꾸 다른 나라 사람으로
본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이들이 대한민국을 살아내는 건 무척 고단한 일 같습니다.
▲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해 탈북 학생들과 함께 미팅하는 모습
탈북 학생들은 통일 한국을 위해 먼저 온 미래입니다. 이들과 일상 속에서
통일 연습이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앱을 만들지만,
언젠가 이 앱이 하나 된 우리를 만드는 데 작은 발판이 되길 기도해 봅니다.
글동무는 남북한 언어 차이로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탈북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제일기획의
재능과 기술 기부로 교육 NGO 드림터치포올과 탈북 학생들이 함께 제작한 살아 있는 사전입니다.
현재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향후 신문과 다른 교과목은 물론
일상 속으로 더욱 확대할 예정입니다. 글동무를 응원해주시고, 참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글동무 애플리케이션 작업에 참여한 TF 멤버들.
심재희 프로, 윤영덕 프로, 정수영 프로, 최재영 마스터, 장종철 팀장, 박규식 팀장,
장지은 프로, 이유리 프로, 정유나 프로, 이미수 프로, 류지원 프로(왼쪽 뒷줄부터 시계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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