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18. 7
이수정 프로(디지털 스튜디오 3팀)
반드시 필요한 일을 재미있게 할 수는 없을까? 심각한 미세먼지에도 마스크 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입김의 온도에 따라 마스크에 인쇄된 그림이 변하는 재미를 선사한다면? 2018년 칸 라이언즈 아웃도어 부문에서 동상을 수상한 <피카부 마스크>는 미세먼지로부터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 주는 따뜻한 캠페인이다.
▲<피카부 마스크>캠페인 영상
회색 도시 속의 사람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행복해야 하는 봄철, 우리는 창문을 굳게 닫아야 했고 거리의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 각자의 길을 바삐 간다. 과거 언젠가 어렴풋이 그려냈던 세기말적인 광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매일 펼쳐지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이었는지 기억하는 일조차 의미 없게 느껴지는 것, 반복적인 경보 알람에 무감각해지는 것.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 앞에 서서히 집단적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입김의 온도로 그려낸 웃음
2017년 겨울부터 2018년 봄까지 우리는 추위도, 미세먼지도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체감했다. 추운 겨울 온몸을 꽁꽁 싸맨 채 황사 마스크까지 착용한 웃음기 잃은 사람들을 보며 이 우울감이 온기가 될 순 없을까, 더 나아가 웃음이 될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서울시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하지만 추운 날 ‘마스크’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아이템에 안정감을 느끼고 호흡하며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특별한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호흡량이 어른들보다 배로 많아 미세먼지에 더 취약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치명적인 대기 상황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이들. 우리는 주변의 어린이들을 보며 몇 가지 눈에 띄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❶ 어린이들은 답답함 때문에 마스크를 쓰기 싫어한다.
❷ 어른들의 적극적 케어 범위(영유아)를 벗어난 등하굣길의 저학년 어린이들(8~10세)이 자발적으로 마스크를 쓰기는 더욱 어렵다.
❸ 앱과 웹 등의 실시간 기상 정보에 접근이 어려운 어린이들은 가시적으로 확인 불가능한 초미세먼지의 등장에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스크 착용이 놀이의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미세먼지를 그나마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마스크를 착용할 수 있게 유도하자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우선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변온 잉크’를 사용해 입김의 온도에 반응해 생겨나는 재미있는 캐릭터 마스크를 만들었다. 뭔가를 수집하고 서로 비교해 보며 재미를 느끼는 아이들의 특성을 살려, 총 아홉 가지 버전의 입 모양 캐릭터들을 제작했다. 캐릭터가 입김의 온도에 의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 마스크에 ‘까꿍’이라는 의미를 가진 ‘피카부 마스크(Peek-a-boo Mask)’라는 이름을 붙였다.
▲ 아홉 가지 캐릭터의 피카부 마스크
그다음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의논해 어린이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 수 있는 교육용 콘텐츠 제작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피카부 마스크 자판기가 탄생하게 됐다. 자판기 내부에는 실시간으로 기상청의 대기 상황 데이터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구축돼 있으며,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가 기준치(35㎍) 이상으로 많아질 경우 자동으로 작동되도록 했다. 또한 작동 중 모션 센서를 이용해 자판기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 피카부 마스크 자판기
피카부 자판기 스크린은 평상시에는 현재의 대기 상황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대기 상태가 나쁠 때에는 교육용 애니메이션이 플레이돼, 미세먼지가 심할 때 마스크의 필요성에 관해 가르쳐 주도록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이 끝난 후에는 자판기에서 랜덤으로 마스크가 나와 직접 피카부 마스크를 체험할 수 있게 했다.
말을 거는 피카부 자판기와 특별한 피카부 마스크를 경험한 어린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친구들을 따라 너도나도 줄을 서서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마스크 체험을 했으며, 재미있는 마스크를 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즐거워했다. 또한 어린이들이 착용한 피카부 마스크는 또 하나의 미디어가 돼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과 동시에 미세먼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볼 기회를 줬다.
함께 ‘앓아 내는’ 미세먼지
디지털 자판기를 체험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 피카부 마스크를 경험한 아이들의 90%가 마스크의 필요성을 인지한다고 답했고, 88%의 아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마스크를 쓰고 싶다고 답했다. 또한 아이들이 피카부 마스크를 경험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서울 시내 버스, 지하철, 대형 옥외 스크린 등 3만여 개의 서울시 매체에 온에어돼 마스크의 필요성을 알리는 영상으로 사용됐다.
피카부 마스크는 미세먼지를 적극적으로 줄이거나 모두가 바라는 궁극적인 솔루션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작은 아이디어로 우리가 버텨 내야만 하는 우울한 현실을 조금 다르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날의 미세먼지도 머지않은 훗날 “그랬었지”로 남을 수 있는, 가볍게 앓고 이겨 낼 수 있는 감기처럼 낫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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