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19. 2
정재학(경제∙경영 칼럼니스트)
요즘 잘 팔리는 가전제품에는 공통적인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 ‘공기’다. 공기청정기, 건조기, 의류관리기, 무선청소기 등이 대표적인데 제품 이름이든 기능이든 어느 한 곳에는 공기와 관련된 키워드가 숨어 있다. 이들은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전통적인 필수 가전들을 제치고 가전의 새로운 ‘4대 천왕’으로 부상 중이다.
선두주자는 단연 공기청정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기청정기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큰 문제가 없는 ‘선택형’ 가전제품이었다. 제품을 구입한다고 해도 황사가 심한 봄철에만 반짝 사용하고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기 일쑤였다.
하지만 요즘은 봄부터 겨울까지 없어서는 안 될 사계절 필수 가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3일간 춥고 4일간 미세먼지가 심해진다는 ‘삼한사미’의 겨울 날씨 탓에 한겨울에도 가정의 공기청정기는 멈출 줄 모르고 돌아간다.
▲ 삼성 공기청정기 큐브 Ⓒ 삼성전자
이제 공기청정기는 가정용 가전제품에서 개인용 가전제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거실에 놓여 있던 공기청정기가 소형화되면서 방으로 하나씩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나 사무실 책상 등에 놓고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공기청정기까지 등장하면서 1가구 1가전에서 1인 1가전으로 발전하고 있다.
공기청정기의 진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헤드셋 모양으로 목에 걸치고 다니는 웨어러블 공기청정기까지 등장했다. 입과 코 주변의 공기를 정화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한 제품이다. 혁신적인 가전제품의 대명사로 불리는 다이슨도 현재 목에 거는 형태의 웨어러블 공기청정기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져 공기청정기 시장의 진화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 에어비다의 웨어러블 공기청정기 Ⓒ iblekorea.com
미세먼지를 뚫고 새로운 대세 가전으로 떠오르고 있는 제품 중 하나는 건조기다. 세탁한 옷을 말려 주는 건조기는 그동안 드럼세탁기에 포함돼 있던 부수적인 기능으로 장마철 한두 번 사용하는 정도였다. 별도의 건조기 제품이 있었지만,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꼭 필요한 때만 가끔씩 사용하는 가정들이 많았다.
하지만 기술 혁신을 통해 전기 사용량을 크게 줄이고 건조 기능이 뛰어난 새로운 건조기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가전으로 떠오르고 있다. 건조기는 이미 세탁기 판매량을 훨씬 앞지른지 오래다.
▲ 삼성 건조기 그랑데 Ⓒ 삼성전자
건조기를 사용하면서 소비자들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먼지의 재발견’에 충격을 받게 된다. 건조기 내부에 먼지를 거르는 필터가 장착돼 있는데, 빨래를 한 번 건조할 때마다 쌓이는 먼지를 보면서 옷에도 얼마나 많은 먼지가 묻어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건조기의 경우 옷에 묻어 있는 먼지를 깨끗이 제거해 주는 역할도 하지만, 공기가 나쁜 요즘 바깥에 빨래를 널지 않고도 빨래를 말릴 수 있도록 해 줘 더욱 각광 받는다. 집집마다 베란다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빨래를 보는 것도 점점 옛일이 되고 있다.
매일 빨 수 없는 옷들을 항상 깔끔하게 관리할 목적으로 개발된 의류관리기의 경우 패션에 관심이 많거나 고급 의류를 잘 관리해야 하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패션 가전’이라는 독특한 틈새를 만들어 냈으나, 최근에는 미세먼지의 영향으로 환경 가전 쪽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무리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 공기청정기를 돌려도 외투에 묻어오는 미세먼지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미세먼지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 결과다. ‘의류 청정기’라는 개념을 접목시키면서 옷에 묻은 미세먼지를 털어 내는 별도의 기능들이 경쟁적으로 추가되고 있다. 아이들 옷부터 어른 옷까지 외출 후 온 가족의 의류를 책임지는 필수 가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삼성 에어드레서 Ⓒ 삼성전자
미세먼지 제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진공청소기 분야도 바빠지고 있다. 먼지 때문에 청소를 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청소를 할 때마다 전원 플러그를 꽂았다 뽑았다 할 필요 없는 무선 청소기가 인기다. 요즘 진공청소기의 대세는 상중심 진공청소기이다. 손잡이 부분에 모터와 먼지통을 부착해 청소기의 중심을 윗부분으로 옮겨 온 청소기를 말한다. 진공청소기를 사용하다 보면 빨아들인 공기를 배출하는 과정에서 미세먼지가 다시 배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상중심 진공청소기들은 필터 기능을 강화해 배출되는 미세먼지를 차단함으로써 청소를 통한 재오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
주방가전 중에서도 인덕션, 전기레인지, 에어 프라이어 등은 음식을 조리할 때 발생하는 연기가 실내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아 실내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요즘은 꼭 공기청정기가 아니어도 가전제품마다 공기청정 기능이 필수적으로 포함돼 있다. 에어컨, 가습기, 제습기처럼 공기청정기와 작동 원리가 비슷한 가전제품들은 이미 공기청정 이상의 기능들을 포함하면서 공기청정기를 대신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월 초부터 가전업체들이 올 여름 판매될 에어컨 신제품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공기청정 기능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에어컨은 냉방 기능 외에 공기청정 기능을 필수로 갖추면서 사계절 가전으로 자리 잡을 채비를 마쳤다.
블루투스 스피커와 공기청정기가 결합된 제품도 있다. 공기청정기가 이제 TV나 오디오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전제품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가전제품에 공기청정 기능이 포함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공기청정기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때가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애덤 스미스는 “공기와 물 혹은 무한히 존재하는 자연의 다른 선물을 사용할 때 인간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집마다 정수기나 생수가 없으면 물을 먹지 못하고, 공기청정 기능이 있는 가전제품이 없으면 제대로 생활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환경 오염은 물과 공기 같은 자유재에 대해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필자 정재학은 오랫동안 경제 전문 기자로 일했으며, 최근에는 경제경영 전문 집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CEO 필수 상식 사전』, 『경제 상식 퀴즈』 등이 있으며, 공저로 『마케팅 성공 사례 상식 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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