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4. 16:00

컴팩트 SUV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딱 두 가지만 본다. ‘디자인’과 ‘가격’. 생애 처음으로 차를 구매하는 젊은 소비자들이 많은 만큼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만족시키면서도 자랑할 만한 예쁘고 힙한 제품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꽤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핸즈프리 파워리프트게이트(자동으로 열리는 트렁크)나 파노라마 선루프 같은 편의 사양들은 사치였고, 2열은 사람이 타는 공간이 아닌 가방을 던져 놓는 공간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컴팩트 SUV는 가성비 좋은 예쁜 장난감이 돼 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형 SUV 시장은 매년 성장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쉐보레가 정체불명의 SUV를 내놓았다. 이 차가 얼마나 규정하기 어려운지 살펴보면 끝이 없을 정도인데, 기존 소형 SUV들보다는 확연히 크면서도 투싼 같은 준중형 SUV보다는 또 작다. 차량의 외관은 머슬카(카마로)를 닮아 아주 볼드하고 남성적인 반면, 실내를 살펴보면 작은 실밥 하나하나까지 컬러로 강조할 만큼 정교하다.

 

 

1.35리터 터보 엔진으로 아담한 심장을 가졌지만, 이를 서포트하는 변속기와 4륜구동 드라이빙 시스템은 5m가 넘는 대형 SUV 트래버스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요상한 차량의 정체는 바로 한국지엠이 수년간 공을 들여 개발한 ‘하이엔드 컴팩트 SUV 트레일블레이저’다.

하이엔드 컴팩트 SUV란 기존 컴팩트 SUV보다 조금 더 크고, 다양한 편의사양을 가진, 그리고 그만큼 조금 더 비싼 제품이다. 사실 가성비가 핵심인 컴팩트 SUV 시장에서 하이엔드 컴팩트 SUV가 먹힐까 싶겠지만, 이미 지난해 7월 출시한 타사 제품이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면서 조금 돈을 쓰더라도 조금 더 좋은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니즈가 확인됐다.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는 그 제품보다 모든 측면에서 크고(전장, 전폭, 전고, 휠베이스), 더 다양한 편의사양을 갖췄다. 그동안 컴팩트 SUV에는 오버스펙으로 치부되던 파노라마 선루프, 9단 자동 변속기까지!

그래서 우리는 트레일블레이저를 컴팩트를 넘어선 임팩트, ‘THE IMPACT SUV’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이제 꽃길 걸을 일만 남았다. 매년 성장하는 컴팩트 SUV 시장, 그리고 그 시장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멋지고, 가장 편리한 임팩트 SUV 트레일블레이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바로 트레일블레이저였다. 아, 정확히 말하면 트, 레, 일, 블, 레, 이, 저 이 일곱 글자가 문제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팽창하는 시장인 만큼 컴팩트 SUV 시장은 그 어느 시장보다 치열하다. 수년 동안 절대 왕좌를 지켰던 베스트셀러 쌍용 티볼리, 후발주자로 등장해 단숨에 1위 자리를 넘보던 현대 코나, 혼라이프 SUV라며 공격적으로 싱글족을 공략했던 현대 베뉴까지. 심지어 기아자동차는 셀토스부터 니로, 쏘울, 스토닉까지 무려 4종의 제품으로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렇게 시장에서 싸우고 있는 국내 제품만 세어 봐도 모두 9종. 겨우 3종이 경쟁하는 준중형 SUV와 비교하면 3배나 치열한 시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트레일…뭐? 트레일블레이저?!

소비자의 Consideration set은커녕 Awareness set에도 명함을 못 내밀고 잊힐 판이다. 트레일블레이저가 영어로 ‘선구자, 개척자’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참고로 왜 이렇게 긴 제품명이 생겼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쉐보레의 본산지 미국에서는 트레일블레이저를 3~4음절 정도로 인식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트레일블레이저 국내 론칭 캠페인의 가장 시급한 목표는 생소한 제품명, 그것도 아주 길고 어려운 제품명을 소비자의 인식 속에 강력히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제품이 가진 다양한 장점은 제품의 이름부터 알리고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소개팅을 하는데 자기 소개도 하지 않고 “내가 최고의 신붓감/신랑감이에요.”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또한 자동차라는 고관여 제품 특성상 제품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제품이 가진 다양한 장점은 소비자가 직접 찾아보고 인정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품명을 각인시킬 것인가?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긴 숫자들을 외우는가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규칙 없이 단순히 01012345678과 같이 늘여 놓았을 때보다 010-1234-5678처럼 그룹핑이라는 하나의 규칙을 부여했을 때 훨씬 쉽게 인식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트레일블레이저, 이 어렵고 길기만 한 일곱 글자를 친절하게 ‘트레일’과 ‘블레이저’로 끊어서 쉽게 읽히도록 하고, 박자감을 부여해 소비자 머릿속에서 반복해 각인시키는 방안을 생각했다. 마치 <기생충>의 박소담이 제시카의 기나긴 스펙을 ‘독도는 우리 땅’의 리듬으로 외우듯이 말이다. (제시카의 징글은 여기서 확인하시라.) 두세 글자의 짧은 제품명을 가진 우리의 경쟁자(셀/토/스, 티/볼/리, 코/나 등)들은 시도조차도 할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우리는 마약김밥, 마약옥수수같이 계속 찾게 되는 마약과 같은 징글을 만들었다. 감각적인 전자음악의 사운드에 가사는 오직 ‘트레일~ 블레이저~ 트레일블레이저’뿐! 광고 내내 이 중독성 있는 징글이 반복된다. 길고 어려운 이름이 징글로 바뀌니 오히려 중요한 자산이 됐다. 거기에 이 징글만큼이나 반복적으로 루핑되는 영상들. 차량 헤드램프의 클로즈업이 여러 번 반복 재생되고, 차량 옆에서 춤을 추는 모델은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가 반시계 방향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 광고를 넋 놓고 보고 있다 보면, 내가 뭘 본 것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귓속에 맴도는 트레일~ 블레이저~ 트레일블레이저! 징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쉐보레 유튜브 채널의 광고 조회수는 2주 만에 860만 뷰를 넘어섰고, 댓글에는 “중독성 있는 광고”라는 찬사와 “너무 중독성 있어서 괴롭다(?)”는 하소연이 함께 달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트레일~” 하고 부르면 아들이 “블레이저~” 하며 달려오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2월부터 제품이 본격적으로 출고되면서 아직 판매량을 집계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올해 수능 금지곡 리스트에 한 곡이 더 추가될 것이라는 사실!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 TV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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