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il Magazine 2020. 4
편집실
“너는 장래 희망이 뭐니?” 어른들이 이렇게 물었을 때 많은 여자아이들이 “저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꿈이에요”라고 대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40~50대가 웃옷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고 다니며 콧물을 닦던 코흘리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진 어머니, 그리고 착한 아내….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 시대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현모양처는 19세기 말 개항 이후 서구에서 유입된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적 형태의 가족이 나타나면서 생겨난 개념으로, 남성이 일터에 나가 경제 활동을 하는 동안 여성은 집에서 가정을 잘 꾸려야 한다는 역할 분담론이 널리 퍼졌다고 하지요.
그 시절, 같은 질문을 남자아이들에게 했을 때 “현부양부(賢父良夫)”라는 대답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죠. 대신 남자아이들은 대통령, 군인, 판사처럼 거창한 꿈을 얘기했습니다. 꿈에도 모범답안이 존재했던 시절이었던지라 이렇게 대답하면 으레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모양처나 대통령이나 자신의 내면에서 오롯이 싹을 틔워 자라난 꿈이었다기보다 외부에서 이식된 꿈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래서 일찍이 신여성의 대표주자였던 화가 나혜석이 이렇게 외쳤는지 모릅니다. “현모양처? 너나 해라, 현부양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주입된 꿈이 아닌, 스스로 ‘자발적으로’ 꿈꿀 권리를 외쳤던 거지요.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다….’ 선망의 대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큰 업적이 있거나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 사람들을 롤모델로 여기며 꿈을 키웠습니다. 집집마다 책장 한쪽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하지만 손때가 묻지 않아 본의 아니게 깨끗하게 보관될 수밖에 없었던) 위인전기 전집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저 높은 곳을 향해 가던 꿈이 낮은 데로 임하고 있습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워너비(wannabe) 대상으로 삼으며 그들의 일상에 다가서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원인과 분석이 있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지기 때문은 아니란 겁니다. 돈, 출세, 명예…. 남들이 인정해 주는 ‘입신양명’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나 자신의 소소한 행복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 ‘갭이어족(Gap Year族)’이 늘고 있다지요. 갭이어는 영국에서 태동한 단어로, 원래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인턴십이나 봉사 활동 등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 기간을 뜻했는데요, 최근에는 학업이나 직장 생활을 과감히 중단하고 여행이나 의미 있는 사회 경험을 통해 자아 탐색의 시간을 갖는 걸 의미하게 됐습니다.
물론 생활이 곤궁하거나 당장의 일상과 맞서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겠지만, 숨 가쁘게 달려온 여정에 쉼표를 찍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도전일 겁니다. 남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이 아닌, 내가 바라는 진짜 나의 꿈을 찾으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제일 매거진 4월호에서는 ‘저 높은 곳’에서 유턴해 ‘낮은 곳’으로 임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꿈을 ‘다운 워너비(Down-wannabe)’라 이름 짓고, 출세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중요해진 시대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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